외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쳐스 제공※ 스포일러 주의
단 한 사람의 손길이 절실한 누군가를 위해 먼저 손 내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손길이 건네졌을 때 기꺼이 맞잡을 수 있을까. 이런 다정함으로 우리는 우리가 바라던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연소일기'는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키면서도 사려 깊게 이러한 물음을 건넨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일까?" 한 고등학교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주인 모를 유서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다. 대입 시험을 앞두고 교감은 이 일을 묻으려고 하고, 정 선생(노진업)은 우선 이 편지를 누가 썼는지부터 찾아보자고 한다.
편지와 학생들의 글씨 모양을 비교하던 정 선생은 편지 속 한 문장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든다. 열심히 쓰다 보면 바라던 어른이 될 거란 믿음으로 써 내려간 열 살 소년의 일기를 읽으며 정 선생은 묻어뒀던 아픈 과거와 감정들을 마주하고, 학생들을 위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는 '연소일기'(감독 탁역겸)는 한 고등학교 교사가 교실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주인 모를 유서를 보며 기억 속에 묻어버린 어린 시절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았다.
외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쳐스 제공"나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빠르게 잊힐 것이다"라는 문장이 담긴 한 장의 편지가 발견되지만, 학교는 이를 조용히 묻고자 한다. 학생의 안위보다 대입 시험을 앞두고 학교가 어수선해질 것이 걱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선생은 편지를 쓴 학생을 찾아 나선다. 그 역시 어릴 적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문장을 봤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재의 정 선생과 과거의 요우제(황재락)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된다. 동생 요우쥔(하백염)은 공부면 공부, 피아노면 피아노, 뭐 하나 못 하는 게 없는 반면 형 요우제는 모든 게 동생에 뒤처졌다. 대신 요우제에게는 다른 가족에게는 없는 풍부한 상상력과 상냥함이 있지만, 아이를 계량적으로만 측정하려는 아빠와 엄마는 그런 요우제를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폭력적으로 대한다.
그럼에도 요우제는 만화책 '해적 이야기'를 보며 '내가 원하는 모습'의 어른이 될 것을 꿈꾸고, 아빠와 엄마를 '가족'으로서 사랑한다. 동생 요우쥔을 질투하지도 않고 그저 '가족'으로 사랑한다. 요우제는 그런 아이이다. 요우제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말 한마디, 그저 작은 사랑 한 조각뿐이다.
외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쳐스 제공어린 시절 모두에게 외면받는 요우제에게 유일하게 다정함을 베푼 건 피아노 과외를 해 준 천 선생님뿐이다. 원하는 어른이 되고 싶었던 요우제는 천 선생님처럼 좋은 선생님을 꿈꾼다.
그 꿈을 떠올린 현실의 정 선생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을 쓴 편지의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찾으며 아이들을 만난다. 마음의 상처를 지닌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며 위로한 정 선생의 진심을 받은 아이들은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연다. 아이들 역시 어린 요우제처럼 다정함의 한 조각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오래된 내면의 상처, 즉 트라우마를 극복해 가는 건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정 선생 역시 한 장의 편지에서 시작한 여정에서 오랜 시간 펼쳐 들지 못했던 일기장을 다시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정 선생이 일기장을 펼쳐 든 순간, 정 선생과 영화가 감춰왔던 비밀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비밀은 관객들을 영화의 제일 첫 장면으로 다시금 데리고 간다. 영화는 제일 처음, 관객들을 충격으로 빠뜨리나 싶더니 이내 안심시키며 시작했다. 이에 경계를 허물고 영화를 대했던 관객들은 일기를 다시 꺼내 맨 처음 장을 들추듯이 다시 한번 영화의 시작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외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쳐스 제공영화의 반전은 관객들의 집중력을 높이며 조금 더 정 선생의 이야기 안으로 파고들게 만드는 동시에 우리가 지금까지 요우제와 요우쥔의 이야기 그리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보며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더듬어 보게 한다.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빠와 엄마와는 다르지만 '외면'이라는 방식으로 형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던 요우쥔은 죄책감에 휩싸여 공부도, 피아노도 손에서 놓는다. 대신 형 요우제가 못다 이룬 꿈인 선생님이 된다. 그러나 상처를 상처로 덮으며 살아온 요우쥔은 어른이 되어서도 곳곳에서 어릴 적 상처를 만나고, 이는 행복이라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난 건 요우쥔뿐만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요우제를 잃고 나서야 회한 속에 삶을 산다. 그 역시 정 선생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못한 채 속으로만 끌어안고 살아온 것이다. 아버지를 원망했던 정 선생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는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가까스로 서로 묻어왔던 마음을 밖으로 토해낸다.
형을 향한 죄책감과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라는 오랜 트라우마를 하나둘 꺼내어 마주한 정 선생은 그제야 진정으로 그동안 차마 애도할 수 없었던 형 요우제를 애도한다. 그렇게 어린 요우쥔을 내면의 어둠 속에 가둬놨던 정 선생은 어린 요우쥔과 어른이 된 요우쥔을 용서하고 마주 안아준다. 단 한 번의 진심 어린 손길을 원했던 학생들을 품에 안아줬던 것처럼 말이다.
외화 '연소일기' 스틸컷. ㈜누리픽쳐스 제공영화는 정 선생의 과거의 현재를 통해 모든 것을 아이의 나약함으로 치부하는 어른들의 모습, 아이들을 성적이라는 수치로 계량해 대하고, 꿈을 빼앗는 어른들의 사회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러나 단순하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다정함은 물론 그러한 다정함을 받아 드는 것조차 용기가 된 세상에서 '연소일기'는 잊고 있었던 그 다정함이라는 제목의 일기장을 다시 펼쳐 들고 한 줄 한 줄 새겨 넣을 용기를 전한다. 그러나 결단코 이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정 선생과 함께 그의 과거를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필요한 건 영화가 건넨 다정함을 받을 용기뿐이다.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어수선해질 수 있는 동선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관객들이 그저 스크린에 몰입만 할 수 있게끔 했다. 또한 어둡고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지만 그조차도 다정하고 사려 깊게 펼쳐냈다. 여기에 정 선생 역 노진업과 요우제 역 황재락, 요우쥔 역 하백염의 섬세한 연기는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영화에 다가갈 수 있다.
95분 상영, 11월 1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외화 '연소일기' 포스터. ㈜누리픽쳐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