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담화 발표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자기 민족의 특색과 기질에 대해 조지 오웰만큼 솔직하게 이야기한 작가를 본 일이 없다. 마치 뼈와 살을 바른 듯이 말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참여작가인 오웰은 <영국,당신의 영국>이란 글에서 "영국이 하늘 아래 가장 계급 착취가 심한 나라이고, 속물근성과 특권의 나라이며, 주로 늙고 어리석은 이들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혹평했다.
영국이 지독한 속물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나치.파시즘에도, 공산당에도 굴하지 않는 또 하나의 민족적 기질이 있다고 오웰은 자랑했다. 그것은 "막중한 위기의 순간에 거의 모든 국민이 함께 느끼고 행동하는 성향"이라고 말했다. 평상시엔 지배계급이 도둑질도 하고, 관리도 엉망으로 한다. 사사건건 방해도 하지만 영국민들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단단히 결속돼 있다는 얘기이다. 엉뚱한 식구들이 살림을 주무르는 집안이다. 그렇지만 적이 오면 단결하는 공통의 기억과 같은 기질을 영국인들은 DNA처럼 갖고 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던케르크 작전이 대표적 케이스이다.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기질이 각기 다르다. 한국인과 영국인의 특색 또한 같을리 없다. 하지만 오웰의 에세이를 읽으며 한국인의 기질이 영국인들과 판박이처럼 닮은 구석이 있다는 사실에 무릎을 쳤다.
12월 3일 밤,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계엄이 등장한 밤, 시민들은 군용차 앞을 가로막았다. 그날부터 12월 14일까지 수백만의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국회대로를 가득 채웠다. 대통령 윤석열을 탄핵심판대에 세울 때까지 단 열하루 밖에 걸리지 않았다. 광장과 도로를 시민들은 깨끗이 치웠다. '평화'를 기원하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외신은 '민주주의 회복력'이라고 찬탄했다. 한국인이 아니라면 어느 민족이 이런 대서사시를 펼칠수 있을까.
지난 4.10 총선에서 선거라는 민주주의 이름으로 시민들은 윤석열에게 큰 회초리를 내쳤다. 대한민국 선장이 이끄는 국정방향은 국민들의 생각과 다르다고 꾸짖었다. 배의 선수를 제발 돌려달라고 호소했다. 호소와 회초리는 불행히도 허사였다. 선장은 국민의 의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일곱달이 지난 뒤 국민의 기본권을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오히려 배신을 감행했다.
촛불 명예혁명 이래 시민들은 정치에 염증을 느꼈다. 지난 2년 간 어떤 실정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돌연 나라에 진정한 위기가 닥쳤다고 직감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사슬로 서로를 단단히 결속했다. 그리고 공통의 기억을 되살려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2.3 내란은 '탄핵'이라는 헌법적 절차로 큰 불이 잡혔다. 하지만 큰 불만 잡았을 뿐 대재앙은 진행중이다. 아직 반동의 잔불이 곳곳에서 법석을 부리고 있다. 2차 재앙으로 번질지 모르는 혼돈속의 잔불이다. 윤석열의 내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수사를 회피한다고 윽박지르던 이가 피의자 신세가 되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피의자보다 수사기관을 농락한다. 2차례의 출석 요구는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한다. 심지어 헌법재판소의 탄핵 절차에도 협조하지 않는다. 대리인도 자격도 갖추지 않은 친구 변호사는 매일 언론에 등장한다. 그는 일정한 방향도 없이 여론을 선전선동한다. 양치기 소년일까. 양치기 변호사일까. 일부 언론은 허튼소리를 너무 진지하게 다룬다. 시민들이 들고 일어섰지만 그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지배세력은 어리석게 행동한다.
대통령 권한대행의 화급한 직무는 무엇일까. 시민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다. 국가위기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일이다. 그 첩경은 헌법 재판관 임명과 내란 특검 수용하는 일이다. 다른 일을 상정하기 어렵다. 헌법절차를 차분하게 이행하는 것만이 국제사회의 불안한 시선을 완화시킬 묘수이다. 한덕수가 할 수 있는 일이 그 외에 무엇이 있을까. 그는 내란도 막지 못한 바지총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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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 한덕수 한대행의 처신은 '배째라식'이다. 한 대행 부부는 윤석열 부부의 '아바타'라도 된 듯하다. 일각에서 한 부부가 윤 부부로부터 지휘조종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윤은 검찰총장 시절부터 검사장을 건너뛰었다. 부장검사에게 직접 전화하는 일들을 괘념치 않았다. 주술도 좋아한다하니 매일 윤 부부의 전화에 시달리는걸까.
그가 경제단체장들을 만났다. "경제는 정말 죽을 맛"이라는 기업인들에게 "국가 경제가 위기"라고 호소했다. 한국 경제와 외교는 지금 국제사회에서 미아신세라 해도 틀리지 않다. 내년 1월 취임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리더십 부재를 틈타 한국을 어떤 희생양으로 삼을지 예단할 수 없다. 하루하루가 누란의 위기다. 눈앞의 이익을 쫓을 틈이 없다. 국가 이익만이 최고선인 시절이다.
헌법 절차 준수를 차분히 이행하는 것말고,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은 결코 없다. 그는 처세의 달인이다. 음모를 꾸미는 교활한 모사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윤의 지휘 통제 하에 있다면 곤란하다. 아주 어두운 식견에 따라 최선을 다한 어리석은 노인네가 된다면 개인도,국가도 더 불행질 것이다.
영국의 처칠은 "적어도 싸우지 않고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 지도자였다. 히틀러와 미지근하게 타협했던 7년 동안 이전 지도자들의 혼수상태를 끝내기로 처칠은 결단했다. 위대한 지도자란 싸울 때 싸워야 한다. 바지 총리의 대가도, 전쟁의 대가도 치르지 않고 내란의 위기를 극복할 방도는 없다. 한덕수 대행은 어디로 떠내려가려고 하는가. 어두운 식견의 노인네가 될까 조마조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