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계시록'. 넷플릭스 제공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니체는 이들을 가장 무서운 존재로 꼽으며 그 이유를 밝혔다.
"신념을 가진 사람은 진실을 알고자 하지 않는다"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은 이처럼 뒤틀린 신념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실종 사건의 범인을 단죄하는 것이 신의 계시라 믿는 목사 성민찬(류준열),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는 형사 이연희(신현빈), 그리고 실종 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 전과자 권양래(신민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사건은 한 남성이 성민찬의 아들 성연우(이정민)를 데리고 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당황한 성민찬은 빗물에 번진 인쇄된 권양래의 사진을 보고, 전자발찌를 찬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범인으로 특정하기에 이른다.
왜곡된 신념은 성민찬을 더욱 깊은 확신의 세계로 이끈다.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우연한 사건과 눈에 보이는 사물들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이며, 점차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는 진실마저 왜곡해 바라보게 된다.
"우연이라는 건 없어요. 다 그분의 인도하심 뿐이죠." -성민찬
영화 '계시록'. 넷플릭스 제공맹목적인 신념은 광기를 낳는다. 이는 역사를 속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됐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로 몰린 이들을 처형했던 '마녀사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기꺼이 연합군 함대에 몸을 던졌던 일본군의 '카미카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적 탄압도 예외는 아니다. 1950년 2월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이 205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며 시작한 '매카시즘'은 냉전 시기 수많은 정치인, 예술가와 학자들을 근거 없이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했다. 이 광기는 법 위에 군림할 정도였다.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인종차별에 앞장서는 '쿠 클럭스 클랜(KKK)', 그리고 지식인을 제거하기 위해 청년들을 동원했던 중국의 '문화대혁명' 역시 어긋난 신념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또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외눈박이'의 형상
극 중 이연희(신현빈), 권양래(신민재). 넷플릭스 제공이연희 역시 동생 이연주(한지현)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불안한 신념을 지닌다. 눈앞에 나타나는 동생의 환영은 그의 복잡한 심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학생 신아영(김보민)이 실종되면서, 이연희는 5년 전 자신의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권양래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는 당시 권양래의 심리를 감정했던 정신과 교수 이낙성(김도영)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당신이 그 악마 같은 놈에게 핑곗거리를 줬어" -이연희
"악마 아닙니다. 권양래. 그냥 인간입니다. 고장 난 인간." -이낙성권양래는 이연주를 상대로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죄자다. 하지만 10년 동안 매일 계부의 학대를 받아온 또 다른 피해자라는 이유로 동정론이 일기도 한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범행을 '외눈박이 괴물' 탓으로 돌리며 비정상적인 신념을 보인다.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신념은 투명한 문밖에 서 있는 '외눈박이' 그림자의 형상으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성민찬이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기 위해 교회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빛과 어둠이 서로 공존하는 장면에서 성민찬의 그림자가 마치 '외눈박이' 형상을 연상시킨다.
영화 '계시록'. 넷플릭스 제공영화 '계시록'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우리의 신념이 우리를 어떻게 형성하는지 믿음과 인간성, 진실과 인식, 선과 악의 미묘한 경계에 대한 영화"라고 전했다. 작품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지금까지 제가 가지고 있는 색깔을 응축해 정리한 작품"이라고 밝혔다.
제작진은 인공적인 조명보다 자연광을 활용한 촬영을 우선시했다고 한다. CG 사용을 최소화하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화면을 담아내고자 했다. 인쇄된 권양래의 얼굴이 빗물에 번지는 장면이나, 천사 형상을 한 구름이 등장하는 모습 등이 그 예다.
여기에 성민찬과 이연희, 권양래가 한 자리에 모인 롱테이크 신은 극 중 긴장감을 더한다. 5분 30초 동안 이어지는 장면 속에서 배우들의 열연과 카메라의 정교한 움직임이 고스란히 담겼다. 광기에 휩싸인 류준열의 연기 또한 눈길을 끈다. 다만, 인물 간의 미묘하고 치열한 관계에 비해 전체적으로 '소리'의 힘은 다소 옅게 다가온다.
극 중 허상을 보는 이연희에게 이낙성 교수가 침착하게 말한다.
"우리, 보이는 것만 봅시다."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 연상호 감독 연출. 류준열, 신현빈, 신민재 출연. 122분.
한줄평: 작금의 세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