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북 김제시 금구면의 한 토종닭 농장 출입구가 쇠사슬로 막혀 있다. 이 농장을 임대 운영한 농민 봉모(53) 씨는 AI로 닭을 출하하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이 극에 달하자 독극물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북CBS 임상훈 기자)
조류 인플루엔자(AI)는 진정국면에 들었지만 가금류를 키우며 막대한 피해를 본 농민의 심정은 진정되지 않았나 보다.
AI가 처음 발생했던 전북지역에서 50대 양계농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김제시 금구면에서 토종닭 3만 5000여 마리를 키우는 봉모(53) 씨의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러나 비단 봉 씨만의 얘기가 아닐 수 있다는 게 축산농민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 전통시장 닭·오리 판매 풀린 날 숨져AI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는 전국 전통시장과 오일장 산닭 판매점의 닭, 오리 판매를 지난 5일까지 금지했다.
6일 자정을 기해 금지조치는 풀렸다. 이날 양계농민 봉 씨는 유명을 달리했다.
이날 새벽 4시 30분께 봉 씨는 서울에 있는 조카에게 전화를 했다.
봉 씨는 "할머니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상한 낌새를 차린 조카는 전북 부안에 사는 봉 씨의 누나에게 "삼촌이 이상하다. 빨리 가보라"고 급히 연락했다.
누나와 매형은 30여 분만에 봉 씨의 집에 도착했다. 봉 씨는 제초제 반 병 가량을 마신 상태였다.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이날 오전 8시께 봉 씨는 눈을 감았다.
봉 씨는 1년에 임대료 1200만 원을 주고 양계농장을 임대해 운영했다. 토종닭 3만 5000여 마리를 들인 지 이날로 107일째. 임대기간은 지난 달로 끝난 상태였다.
토종닭은 60~70일쯤 키워 출하한다. 2만 여 마리쯤 출하했을 무렵 AI가 터졌다. 이후로 자식 같은 닭 만 5000여 마리는 애물단지가 됐다. 사료와 왕겨, 기름 값 등은 하루에도 수백만 원씩 드는데 출하할 수 없는 날들이 계속됐고 타는 속을 술로 달랠 수밖에 없는 날들도 이어졌다.
출하 금지 조치가 풀려도 그동안 전국 농장에 묶여 있던 토종닭들이 한꺼번에 풀리기 때문에 봉 씨의 남은 닭 만 5000여 마리가 다 출하되려면 짧게는 일주일, 길면 열흘 이상 걸릴 터였다.
제초제를 마시기 전날 봉 씨는 매형에게 1500만 원을 빌렸다. 그 돈으로 왕겨, 기름, 사료 값 등 밀린 대금을 지불했다.
◈ 홀로 된 노모, 남은 닭, 치유되지 않은 농심6일 찾은 봉 씨의 농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쇠사슬로 막힌 출입로는 퇴로마저 빼앗긴 패잔병 같은 봉 씨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서울에서 장사를 하던 봉 씨는 제법 벌이가 됐지만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몇 년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결혼을 하지 않은 봉 씨는 거동을 못하는 노모의 대소변 수발을 하며 효심이 지극하기로 소문났다.
"아픈 어머니가 하루라도 더 사셨으면 좋겠어. 그래서 공기 좋은 고향으로 내려왔지. 돈은 큰 욕심 없어. 어머니 병원비 정도만 벌 수 있으면 나는 괜찮아."
지인들은 평소 봉 씨의 말을 되새겼다. 노모는 아직 봉 씨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모른다. 큰 충격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에 가족들은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주인 잃은 닭들도 황망한 모습이다. 영세한 양계업자인 봉 씨는 자동화된 농장을 임대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농장은 일일이 손을 써야 일이 된다. 그만큼 토종닭들에 대한 애정도 컸을 것이고, 닭들 역시 주인과 접촉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 잃고 출하시기를 훌쩍 넘긴 닭들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양계업에 종사하는 봉 씨의 지인 임모 씨는 농장을 훑어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봉 씨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임 씨는 "영세한 양계농가들은 지금 봉 씨와 다 똑같은 처지, 똑같은 심정이다"고 짧게 말했다.
지난 달 17일 전북 고창의 한 씨오리 농가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AI는 슬슬 진정 국면에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