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증권사들이 발행한 기업 보고서는 총 2만5709개. 그중 매도 의견은 단 2건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단 한명의 연구원이 낸 의견이다. 연구원들이 매도보고서를 내는 데 겁을 내는 만큼 용감한 그에게 '베스트 애널리스트' 1위를 줄 법도 하지만 그는 3위에 그쳤다. 김형근(38)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 그를 만났다.
'증권가에 매도보고서가 없다'. 어제오늘의 비판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식시장에선 여전히 매도보고서를 찾기 어렵다. "매도보고서를 내야 할 땐 과감히 낼 것"이라는 모 증권사 센터장의 말이 비장하게 들리는 건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매도보고서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지난해 상반기(GS건설)와 하반기(삼성엔지니어링) 각각 하나씩의 매도보고서가 나왔다. 모두 김형근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이 작성한 것이다. 그는 증권업계의 이단아일까. 왜 남들은 내지 않는 매도보고서를 냈을까.
✚ 지난해 매도보고서가 단 2개밖에 없었는데, 김 연구원이 작성한 거더라. 이유가 뭔가.
"해당 기업에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연구원으로서 내 친구나 내 가족이 사도 되는 종목을 추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000억원이 넘는 실적쇼크를 낸 기업의 주식을 사라고 할 수 없었다. 연구원의 도리가 아니다."
✚ 다른 연구원들처럼 '비중축소'나 '중립'으로 표현해도 되지 않나.
"맞다. 하지만 그건 장기적인 관점에서나 낼 수 있는 의견이다. 기업의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선 그 기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순식간에 망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증권사 연구원은 나를 믿고 투자하는 투자자를 위해 정확한 분석을 해줄 필요가 있다."
김형근 연구원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장을 계속했다. 건설 분야에서는 '내가 최고 전문가'라는 당당함이 엿보였다.
✚ 의견을 명확히 밝히는 스타일인 것 같다.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사실 증권사에서는 매도보고서만큼 '강력 매수' 의견도 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해당 기업을 분석한 결과가 확실히 긍정적이라면 '강력 매수'도 과감히 할 거다. 그럴 땐 내 가족이나 친구가 사도 괜찮을 종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김 연구원은 증권사 출신이 아니다. 20대 후반 GS건설에 입사해 8년간 근무했다. IR팀에 근무할 때 중동 건설현장을 방문했다가 '중동통'이라는 평가를 받아 2012년 5월 메리츠종금증권에 스카우트됐다. 흥미로운 건 그가 맨 처음 매도보고서를 낸 기업이 친정 GS건설이라는 점이다.
✚ 그래도 친정인데 GS건설로선 섭섭했을 것 같다. 별 말 없었나.
"증권사 연구원은 종착역이 아니다. 건설산업 전반을 공부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산업계로 돌아갈 거다. 하지만 연구원으로 있을 동안은 본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도보고서를 낼 당시 팩트를 당당하게 말하니까 GS건설도 이해해주더라."
기업 입장에서 매도보고서를 좋아할 리 없다. 어떤 기업들은 부정적인 보고서를 쓰면 연구원의 탐방을 금지하기도 한다. 아무 보고서도 쓰지 말라는 거다. 특정 기업의 얘기가 아니다. 국내 대기업은 모두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연구원 입장에선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매도보고서를 쓰는 건 그만큼 쉽지 않다.
"내 가족이 사도 되는 종목 추천"
✚ '매도보고서를 내면 업계에서 매도당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았나.
"특별한 불이익은 없었다. 친정인 GS건설에 대한 매도보고서를 쓴 터라 삼성엔지니어링에서도 이해를 하더라. 특히 보고서를 쓰기 전 해당기업에 '우려가 있다'고 전했고, '매도'에 해당하는 보고서를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어떤 부분이 우려되는지 명확히 제시했고, 그게 해결되면 괜찮아질 거라는 점도 명시했다. 그래서 해당기업에서도 기분이 덜 나빴던 것 같다."
✚ 회사(메리츠종금증권)에서는 어떤 반응이었나.
"회사로선 매도보고서를 내서 좋을 게 없다. 영업에 지장이 있어서다. 하지만 해당기업의 내재적 가치가 발현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센터장이 존중해줬다. 각자의 영역을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
✚ 마치 매도보고서를 내는 노하우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면 문제될 게 없다고 본다. A라는 사실을 B로 해석해서 C로 풀어내는 매도보고서가 아니었다. A를 A로 해석해서 얘기한 거다. 오버한 게 아니고, 틀린 게 아니니까 해당기업에서도 굳이 반발하지 않은 거다."
매도 의견을 내는데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확해야 한다'는 리스크가 있다. 실제로 그의 분석은 정확했다. GS건설의 주가는 매도보고서가 나왔을 당시(2013년 4월 13일) 4만2000원에서 6월 20일 2만6750원으로 떨어졌다. 삼성엔지니어링의 주가는 10월 21일 매도보고서가 나온 이후 7만4100원에서 12월 16일 5만5600원으로 하락했다. 그리고 그가 문제점으로 지적한 부분이 해결된 후부터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 올 2월 13일 현재 각각 3만500원과 7만5500원에 거래되고 있다.
✚ 매도보고서가 미치는 파장이 만만찮을 것 같다.
"책임감이 중요하다. 틀린 의견을 쓰면 바로 아웃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투자자에게도 해당기업에도 미치는 영향이 커서다. 매도보고서와 마찬가지로 '강력 매수'가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 2011년 미래에셋, 삼성, 우리, 한국, 한화 등 9개 자산운용사가 한국형 헤지펀드를 출시하자 매도보고서도 많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예상이 빗나갔다. 이유가 뭐라고 보나.
"구조적인 문제다. 외국의 경우는 헤지펀드의 규모가 커서 쇼트(매도)를 해도 수익을 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헤지펀드는 규모가 작아서 그런 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매도 의견이 큰 역할을 할 수 없다. 헤지펀드 규모가 좀 더 커지면 환경이 좋아질 것으로 본다. 또 외국 증권사의 경우, 보고서가 모두 공개되지 않고 돈을 내고 사서 본다. 게다가 보고서가 정확하다고 판단되면 매도 의견에 대해서도 거래수수료를 줘서 보상을 해준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다. 보고서는 무료로 공개된다. 매도 의견을 내도 운용사나 기관투자자, 혹은 펀드매니저가 매도 거래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매도 의견이 실질적인 매도 거래로 연결되지도 않는다는 거다."
✚ 매도보고서가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책임감이란 측면에서 뒷북 보고서 문제도 심각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주가가 오르거나 떨어질 것을 알고 있으면서 보고서를 늦게 쓰는 걸 뒷북 보고서라고 한다. 일부러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기존에 주식을 들고 있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한 측면이 있다. 주식을 팔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거다. 얼핏 타당한 것 같다. 하지만 정보가 많은 기관투자자들은 큰 타격이 없지만 개인투자자는 정보 공유성이 떨어져 손해를 볼 수 있다. 때문에 당연히 그런 식으로 보고서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
애널리스트 평가제도 손질해야
✚ 향후 매도보고서나 강력 매수 보고서를 자주 볼 수 있으려면 많은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
"연구원이 자기 의견을 소신껏 낼 수 있으려면 매도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기업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자본시장도 변해야 한다.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매수 의견만 내는 분위기를 조성해선 안 된다. 특히 현행 애널리스트 평가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어떤 연구원이 더 나은지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 정량적 평가가 이뤄지지 못하니까 문제다. 예를 들어 1등 애널리스트의 점수는 2등~10등의 점수를 합산한 것과 맞먹는다. 1등에게 10점을 줬으면 10등에겐 1점을 주는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매수보고서만 제때에 잘 내도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도 바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