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모아파트 10층에서 최모(46)씨가 투신자살을 위협하며 경찰과 대치하다 경찰의 구조를 뿌리치고 아파트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서울=연합)
어제(12/23) 낮 2시 30분쯤. 기자실에서 강동경찰서 형사들이 떼를 지어 어딘가로 출동하고 있다는 소릴 들었습니다.
"아차차...강력 사건이 터졌구나"
얼핏 강동구 길동의 모 아파트에서 인질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어쩌겠습니까? 바로 현장으로 쐈습니다.
경찰 기자의 역할이 바로 그거니까요.
3시쯤 강동구 길동의 S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해보니 벌써부터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고 수백명의 시민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둘러보니 기자들 중엔 제가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했더군요. 마침 도착하는 순간 엠뷸런스에 한 아주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채 실리고 있었습니다.
경찰기자 직감으로 ''중상'' 아님 ''사망''이었습니다. 아주머니를 싣는 119 구조대원에게 물었죠. "죽었습니까?"
순간 아주머니의 감겼던 눈이 번쩍하며 띄이더군요. "기자 양반, 나 아직 살아있어"라고 말하듯...
현장엔 낯익은 얼굴들이 많았습니다. 강동경찰서 형사과장님이 보이길래 다짜고짜로 묻기 시작했습니다. 과장님은 인질강도가 아니라 가정폭력이라고 짧게 말씀하시더군요.
다음은 과장님을 상대로 취재를 해 제가 전화로 불렀던 기사 1보의 내용입니다.
CBS뉴스 1보 보도,"부부싸움끝에 투신자살 소동" |
사업실패로 부부싸움이 잦았던 40대 자영업자가 부인을 흉기로 찌르고 자신은 투신하겠다며 자살 소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 3시쯤 서울 길동의 한 아파트에서 45살 최모 씨가 부부싸움 도중 부인을 흉기로 찌르고 아파트 10층 난간에 매달려 자살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흉기에 찔린 부인 이모씨를 병원으로 옮겼으며 최씨에 대해서는 설득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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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건의 사정은 이렇습니다.최씨는 경기도 송탄에서 건축업을 하는 사람인데 최근 불경기인데다 사업도 시원찮아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 어제 오후 2시쯤 최씨의 막내아들(초등 4년)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터넷을 켜고 게임을 하더라는 겁니다.
2시 30분쯤, 갑자기 최씨가 게임을 즐기던 아들의 목을 졸랐고
이에 놀란 부인 이모씨가 ''뭐하는 짓이냐''며 나무라자 부엌에 있던 과도로 이씨를 찌른 것입니다.
그 뒤 최씨는 아파트 10층 베란다 난간밖에 기대어 서서 떨어져 죽겠다고 소리를 치며 자살 소동을 시작했구요. 주민들의 신고를 받은 119가 부인 이모씨를 병원으로 후송한 시간은 오후 3시쯤이었구요.
난간에 매달린 최씨는 술에 취했는지 아니면 환각상태였는지...
들어도 알 수 없는 말들을 계속해서 되풀이 했습니다.
강동경찰서 김수정 서장님을 비롯해 경찰들이 집안에 들어가 최씨를 향해 그만두라고 설득을 해봤지만 최씨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이때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모 방송사 기자들이 최씨의 집 바로 윗집 베란다를 통해 마이크를 들이밀며 최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입니다.
그 기자들은 최씨에게 이렇게 소리치더군요. "아저씨 주장하는게 도대체 뭡니까? 저기요 좀 크게 말씀해 주세요"
미친 X들... 떨어져 죽겠다는 사람에게 인터뷰 요청이라니.
몇달전 모 방송의 한 여기자가 납치 당한 주부에게 전화해 지금의 심정이 어떠냐고 물었던 엽기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납치 당한 사람의 생명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특종에 눈이 멀어 저지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대다수의 기자들은 말도 안된다는 비난과 함께 자성의 목소리를 냈었죠. 하물며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주장하는게 뭐냐고 묻는 기자들은 도대체 어떤 뇌구조를 가진 사람들입니까?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무뇌아(無腦兒)들이 판치고 있습니다.
3시 30분쯤 학교에서 전화를 받은 최씨의 큰딸이 아버지를 설득하러 뛰어왔고, 최씨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도 같은 이유로 최씨의 아파트에 도착했습니다.
3시 45분쯤 최씨를 강제로라도 붙잡기 위해 경찰 특공대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 경찰특공대가 아파트 옥상에서 최씨 생포작전을 수행하려던 오후 4시...
최씨의 집에 미리 들어가 있던 몇몇 경찰들이 "갑자기" 난간에 있던 최씨를 낚아채는가 싶었는데 제대로 잡지 못해 최씨의 웃옷이 벗겨지면서 최씨는 20여미터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번지 점프를 하다...'' 한편의 영화같았던 영상이 스쳐 지나갑니다. 최씨는 미리 설치된 안전 공기 매트에 떨어져 다행히 생명은 건졌습니다. 하지만 그순간 밑에서 최씨의 낙하모습을 생생히 지켜봤던 저는 곁에 있던 경찰들이 무심고 내던진 말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XX 못 뛰어내려...막상 뛸려니까 겁나거든..."
"연말에 큰 액땜을 하는구만"
"죽을놈은 남고생 시키지 말고 빨리 죽어야돼"
"저렇게 난리치는 놈 치고 떨어져 죽는놈 내가 본 적이 없다"
고등학생인 큰딸과 담임목사 그리고 경찰서 서장이 위에서 설득하는 사이 밑에서는 불구경이나 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들.
죽겠다는 사람 인터뷰하는 기자. 빨리 죽으라고 비야냥 거리는 경찰.
오십보 백보...어쩜 이리도 궁합이 잘 맞냐?
눈앞이 멍멍합니다. 개판같은 세상입니다.
"으르렁...멍멍...왈왈"
CBS블로거 최철 ironchoi@cbs.co.kr
부부싸움 후 투신자살을 시도한 최모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