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대한민국이 ‘메르스 공포’에 휩싸였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3년 4월 중국의 심장 ‘베이징’도 ‘사스 창궐’로 도시 전체가 공황에 빠졌었다. 그때 기자는 베이징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다. ‘메르스 방역’에 필요한 교훈을 찾고자 베이징의 당시 상황을 날짜별로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2003년 4월 베이징 시내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시민들. 당시 중국 정부는 '사스'와 관련한 정확한 정보를 내놓지 않았지만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고 있었다.(사진=변이철 기자)
'베이징에서 사스(SARS)가 확산하고 있다'는 소문은 2003년 3월 초부터 암암리에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한 달 이상 ‘사스 환자 현황’ 등 관련 내용을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중국 언론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침묵했다.
베이징 시민들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직감했다. 당연히 정부와 언론에 대한 불신이 점차 고조됐다.
2013년 4월 중순을 넘어가면서 베이징에서는 마스크를 한 사람이 급증하고 있었다. 4월 18일 오후 수업을 마치고 칭화대학 동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마스크를 한 사람 수를 세어보았다. 5일 전보다 대략 5배나 늘었다.
사스에 대한 공포가 북경 사람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리고 그만큼 '사스’에 관한 소문을 주변에서 많이 접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외국인인 나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스’ 관련 소문을 적지 않게 접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베이징대 경제학부 교수 모친이 ‘사스’에 감염돼 이미 사망했고, 이 교수는 물론 가족 모두가 감염됐다. 이 때문에 경제학부 수업이 중단됐다.
2. ‘북경판 용산전자상가’인 중관춘(中關村) 부근의 소학교에서 사스 감염학생이 발생했고, 이 학생은 이미 숨졌다. 그리고 이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3. 역시 중관춘의 한 회사에서 '사스'에 감염된 직원이 발생해 건물 전체가 폐쇄됐다.
4. 칭화대학교 부속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사스’ 의심환자로 판명돼 2학년 학생들이 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학교 학생들의 칭화대학 학생식당 출입도 금지됐다.
5. 임업대학교 학생이 ‘사스’에 감염돼 이 학교가 곧 휴교에 들어간다.
6. 베이징주재 일본대사관은 자국민에게 현재 베이징의 ‘사스 위험도’를 4급으로 고지하고 있다. (위험도 최고 5급)
7. 산시성(山西省)의 수도인 타이위안(太原)의 상황도 심각하다. 모든 소학교와 중학교가 이미 휴교에 들어갔다.
학교 안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우선 수업에 참가하는 외국인 학생 수가 학기 초의 1/3수준으로 크게 줄었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과 외국인 학생들이 ‘사스’에 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다들 불안해서 책을 잡지 못했다.
학생들은 주로 ‘중국 당국이 사스에 관한 정보를 정확히 제공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늘어놓았다.
중국인 교사들도 여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치지 못했다. 몇몇 교사들은 ‘자신들도 중국 당국의 발표를 믿지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실토하는 일도 벌어졌다.
일부 학생들은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앞으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감이 캠퍼스에 가득했다. 5월 11일로 예정된 HSK(중국어 능력평가 시험)도 연기됐다.
식당에서도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음식점에 들어서는 손님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흰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도 마스크를 벗지 않는 여자 손님들이 눈에 띄었다. 한 명은 음식이 나오자, 그때야 마스크를 벗고 젓가락을 들었다. 다른 한 명은 계산을 치른 뒤 주문한 음식을 받아들고 서둘러 식당을 떠났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2003년 4월 18일자 베이징청년보 1면. 중국 언론은 사스 환자가 급속히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계속 침묵을 지키다 이날을 기점으로 보도 태도에 변화를 보였다.
중국 신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궁을 관람하는 외국인들의 사진을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으며 "북경에서 일하고, 여행하고, 공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큰소리를 쳐왔다.
하지만 4월 18일을 기준으로 보도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이날 북경청년보(北京靑年報)의 1면 톱기사는 사스의 위험성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제목을 “早發見 早報告 早隔離 早治療”(일찍 발견하고, 일찍 보고하고, 일찍 격리하고, 일찍 치료하자)로 뽑았다.
이 신문은 또 중국당국이 5월 1일부터 시작되는 노동절 연휴(5/1~7) 동안 학생들의 단체여행을 금지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절 특수'를 누려야 할 여행사들은 '이 기간에 여행객들이 지난해보다 절반 아래로 감소할 것'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중국 내 ‘사스 환자 현황’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여전히 신문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방송도 국내 상황보다는 홍콩과 동남아 등 해외의 사스 발생 상황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국제사회는 "중국 정부가 사스와 관련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며 비판을 쏟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