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이반도 추락 지점에 흩어진 러시아 여객기 잔해. 224명 사망.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
1988년 12월 21일, 미국 팬암기 103편이 스코틀랜드 로커비 지역 상공을 날다가 폭발했다. 기내에는 폭탄이 실려있었고 탑승객 259명은 사망했다.
1989년 9월 19일 사하라 사막을 날던 프랑스 UTA 772편에서 폭탄이 터졌고, 탑승객 171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 두 사건은 여객기 폭탄 테러로 인해 수백 명이 숨진 과거 사례다. 팬암기가 추락한 로커비 지역에는 직경 47m 가량의 분화구가 생길 만큼 사고 여파가 컸다.
지난 주말 이집트 시나이반도에 추락한 러시아 여객기도 폭탄에 의해 폭발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위의 두 사례 이후 20여년 만에 대규모 여객기 폭탄 테러가 발생한 셈이 된다.
◇민간인 대상 여객기 테러 20여년만…공통점은?전 주사우디 미국 대사 차스 프리먼은 러시아 스푸트니크를 통해 이번 러시아 여객기 추락이 1988년 팬암기 추락과 상당히 비슷한 양상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보당국에 따르면 이번 러시아 사고기의 경우, 위성에 열 감지는 나타난 반면 미사일 흔적은 잡히지 않았다. 열 흔적이 포착됐다는 것은 여객기가 상공에서 폭발했다는 정황을 뒷받침한다.
또 폭발이 일어났다면 기내에 폭탄이 실려 있었을 공산이 큰 것으로 추정돼, 역시 과거 사례와 비교되고 있다.
1988년 팬암기 사건 때도 플라스틱 폭발물을 장착한 휴대용 녹음기가 기내에 실려 있었다. UTA 여객기에는 이슬람 지하디스트가 탑재해둔 것으로 추정되는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
◇폭탄 테러라면 배후는 누구일까?한편 이번 사건이 폭탄 테러로 판명된다면, 테러 주체는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또는 그 연관단체일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가장 높다.
일단 IS는 이번 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고, 조만간 어떤 방식으로 테러한 것인지 방법을 밝히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중동 지역 테러조직들은 오랜 기간 여객기 테러 등 대규모 인명피해를 유발할 수 있는 테러를 계획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2010년 알카에다의 시도가 미수로 그친 것을 제외하면 최근 20여년 간 대규모 여객기 폭탄 테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알카에다는 당시 런던과 두바이를 출발해 미국 시카고로 향하는 화물기에 폭탄을 장착한 프린터기를 숨기려다가 실패했다.
민간인이 탄 여객기를 폭탄 테러한 사례는 대부분 '보복성' 테러였다. 20여 년 전 팬암기 테러는 1986년 리비아 정부가 미국의 트리폴리 내전 개입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번 러시아 여객기 사고는 러시아가 시리아 내전에 전격 개입하기 시작한 지 한달여 만에 발생한 것이다. IS의 입장에서는 충분한 보복 동기다.
◇민간인 겨냥 여객기 테러라면?…'9.11 공포 재연'만약 이번 러시아 여객기 추락이 IS의 소행으로 밝혀진다면, 민간 여객기를 대상으로 한 테러 국면이 수십년 만에 다시 펼쳐지는 셈이다. 폭탄 테러는 아니지만 역시 민간인이 탑승하고 있었던 여객기가 납치됐던 9.11 테러의 공포까지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와 항공업계는 강한 우려감을 드러내고 있다.
중동 전문가 하 헬라이어 박사는 영국 BBC에서 "테러조직의 여객기 테러가 언젠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은 해왔지만, 한 번에 200명 넘는 대규모 민간인 사망자가 나온 것은 경악할 일"이라고 말했다.
또 IS로서는 엄청난 선전 효과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번 사건의 경우, 한 번에 수백 명의 민간인 참사를 일으킴으로써 러시아와 이집트라는 IS의 주적에 동시에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그간 IS의 활동 양상과 사뭇 다르다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IS의 테러라면, 이들의 테러 양상과 전술이 급변했음을 나타내는 것과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IS 전술은 주로 중동 역내 영토 확장에 공력을 집중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여객기 테러를 주요 활동으로 삼아온 알카에다와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알카에다는 911 테러를 비롯해 이후에도 숱하게 서방 항공기를 겨냥한 격추 및 폭탄 테러를 시도했다. 한 번에 대규모 인명피해를 일으킴으로써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IS는 이라크와 시리아 내 영토 확장 및 세력 구축에만 힘을 써왔고, 역외 서방을 향한 테러에는 비교적 관심이 적었다. 언론의 주목 또는 선전이 필요할 때는 인질을 참수하는 충격적인 영상을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규모 테러에 비하면 조직으로서도 위험부담은 적고 효과는 큰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명백히 중동 역외로 확대된 국제적 스케일의 사안이다. 또 타깃은 러시아다.
헬라이어 박사는 "IS의 테러가 확실하다면, 호텔 등에서의 민간인 인질 납치 정도로 이뤄져왔던 테러 규모가 급격히 확대된 양상"이라고도 덧붙였다.
물론 사실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 러시아와 이집트는 테러 의혹에 일단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영국 군은 이미 이집트로 이동해 샤름 엘셰이크 공항을 집중 수색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폭탄 테러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탑승객이 몸에 지니고 탔을 확률보다는 화물칸 같은 곳에 폭탄이 실렸을 확률이 크다"고 보고 있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포함 다수의 당국자들도 이번 사건을 테러조직의 폭탄 테러로 본다는 발언을 하고 있다. 특히 이집트 샤름 엘셰이크 공항의 보안이 원래부터 비교적 취약한 편이었으며, 지상에서 폭탄 탑재 작업을 도운 인원도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