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면서 제조·판매 업체의 과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피해자들이 법원에 낸 국가배상 소송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앞서 법원은 피해자들이 "국가가 유해물질 관리·감독 의무를 소홀히 했다"며 낸 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검찰 수사를 통해 정부의 책임을 규명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서 기존 판결이 뒤집힐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6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은 현재 6건이 계류돼 있다. 이 가운데 1심 결론이 나온 사건은 박모 씨 등이 2012년 1월 제기한 소송 한 건으로, 현재는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박씨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는 소장을 접수한 지 3년 만인 지난해 1월 "국가의 과실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당시는 검찰이 수사에 나서기 전이어서 재판부가 확보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제한적인 때였다.
그러나 검찰이 의지를 갖고 수사 대상을 정부로까지 확대한다면, 관계부처 공무원들이 살균제 시판 과정에서 현행법을 위반한 사실이 있는지 등을 따져볼 수 있다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우선, 1심 판결에서 가장 쟁점이 됐던 사안은 가습기 살균제의 주성분인 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에 대한 유해성 심사가 적법하게 진행됐는지 여부였다.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은 2003년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에 따라 PGH의 유해성 실험 자료를 심사한 결과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정했다. '급성 경구 독성이 낮고, 피부와 눈에 자극성 및 부식성,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물질도 아니며, 돌연변이 유발 물질이 아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대해 법원은 "각 법령 규정에 따른 것으로 보이고, 당시 유해물질의 정의나 기준 등에 비춰볼 때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를 유해물질로 지정·관리하지 않은 데 대해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논문을 통해 당시 정부가 제대로 된 심사를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수입업자가 유해성 심사를 신청하면서 제품 배출경로를 '스프레이 또는 에어로졸'로 표시했는데, 정부가 흡입 독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 등에 관한 규정을 보면 '물리화학적 성질이나 용도상으로 주 노출경로가 경피 또는 흡입으로 판단되는 경우 이에 대한 시험성적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박 교수는 "이 규정에 따라 업자는 경구 독성은 물론 흡입과 경피 독성에 관한 시험성적서를 제출했어야 한다. 만약 제출하지 않았을 경우 심사기관은 반드시 해당 독성 자료를 요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자료제출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것이 명백하다"며 "적법하게 유해성 심사를 했더라면 생명·신체에 대한 위해 발생 가능성을 예견하고 적절한 손해회피 조치를 취함으로써 살균제 피해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쟁점은 당시 가습기 살균제가 유해화학물질과 의약외품, 공산품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아 정부의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법원은 "공산품안전법상 살균제로 판매될 경우 자율안전확인 및 신고의무를 제조업자에게 강제할 근거가 없다"며 "살균제는 가습기의 물때 방지 등 청소를 위한 용도로 사용돼 의약외품에도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는 법원이 최종적으로 담당 공무원의 과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됐다.
환경부가 2012년 9월 가습기 살균제의 주성분인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 등에 대해 "흡입하면 매우 유독하다"며 유독물로 지정하기 전까지 PGH를 제외한 살균제 독성 성분에 대한 유해성 심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감염병 예방을 위해 살균·살충 및 이와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는 제재'를 의약외품으로 지정해야 하지만, 당시 가습기 살균제를 의약외품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의약외품으로 지정된 건 살균제 피해 사건이 불거진 이후인 2011년 11월에서였다.
정부는 감시망의 마지노선이라 할 수 있는 공산품에서조차 독성 살균제를 미리 걸러내지 못했다.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에 따라 업체가 가습기 살균제를 세정제로 판매하려면 산업통상자원부 산하기관의 인증을 거쳐야 하지만, 당시 '살균제'라는 이름으로 판매돼 인증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산자부의 설명.
하지만, 최근 일부 가습기 살균제가 시판에 앞서 KC(국가통합인증)마크를 받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산자부가 애초에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CBS노컷뉴스가 확인해보니 세정제로 분류된 '옥시싹싹 곰팡이 제거제'의 경우 2007년 4월 자율안전확인 인증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제조업체의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선 세정제라고 판단해 KC마크를 부여했으면서, 옥시 등 살균제에는 다른 잣대를 들이댔다는 것도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특히 산자부 국가기술표준원은 2007년 8월 '홈워시 가습기 세정제'를 자율안전확인 대상으로 인증했다가, '안전성 확인 불가'라는 이유로 인증을 취소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애당초 적법한 심사가 이뤄졌었는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법원은 "질병관리본부 등이 즉시 역학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관계법령에 따른 의무를 게을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장하나 의원은 "2006년 유행한 '소아급성 간질성 폐렴'에 관한 논문과 2008년 '급성 간질성 폐렴의 전국적 현황조사' 논문이 대한소아학회지에 게재됐는데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이 공동저자로 참여했었다"고 지적했다.
질병관리본부가 2011년 4월 서울아산병원으로부터 역학조사 의뢰를 받기 전부터 급성 폐질환 발생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1심 판결 이후 정부의 논리를 반박하는 단서들이 추가로 밝혀지고 있는 가운데 관건은 검찰의 수사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애초에 정부는 살균제 독성 성분에 대해 왜 심사를 안한 것인지, 일부 가습기 살균제는 어떻게 KC마크를 받았는지 등을 밝혀내려면 검찰이 관련 공무원들을 불러 조사해야 한다"며 "그렇게 되면 국가배상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