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 한가람역사문제연구소장이 7월 27일 사무실에서 조선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다.(사진=황진환 기자)
'칼날 위의 역사'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제연구소장과의 인터뷰가 7월 27일 마포구 사무실에서 1시간 30분 가량 진행됐다.
청와대 민정수석과 검사장의 비리, 사드 배치 갈등 등 총체적 난국을 맞고 있는 이 상황에서 과거 우리 역사에서 배울점은 무엇인지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의외로 역사에서 배울게 많았다. 검찰권력의 견제를 위해서는 상호견제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것, 사드 배치 논란에서는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던지는 시사점, 방산비리 군기사고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독립군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것, 조선시대에도 음서제에 한계를 둔 점은 참고할 만하다.
난국에서는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혁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체제를 뒤엎는 혁명을 불러온다는 것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지식에 기반한 통찰력 있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 소장의 진단이다.
▶ 우병우 민정수석, 진경준 검사장 등 사정 핵심 책임자들의 부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과거 역사 중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게 있습니까?= 우리는 자꾸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의 도덕적인 책임으로 돌리고, 아니면 검찰이 자정을 못했다, 자체 개혁을 못했다,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근본적으로 잘못된 거예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조선 선조들은 5백년 역사 중에 사정기관 책임자들이 물의를 일으키거나 그 지위를 이용해 사건에 개입해서 돈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 첫째, 수사권을 가진 부서를 여러 개 만들어 놓았어요. 지금의 검찰 격이 사헌부이고, 국회에서 논의 중인 공직자비리수사처가 말하자면 의금부이거든요. 여기에 수사권 있는 기구는 형조도 수사권이 있고, 포도청도 있고, 한성부도 있고. 그게 약간씩 다루는 분야가 다릅니다. 의금부 같은 경우는 임금의 하명사건을 주로 다루고, 사헌부가 지금의 검찰격이고, 포도청은 일반 사건에 대해 광범위한 수사권을 가지고 있고, 이 기관들 중에서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은 탄핵기능이 있어요.
예를 들어 누가 사헌부에 가서 고소를 했는데, 사헌부에서 잘 아는 사람이다, 권력자라 해가지고 수사를 안 하면, 이 사람을 의금부에 이첩하면 감옥에 가둬요. 너 이 사건 접수하고 왜 수사를 안 하는 거냐 너 돈 먹었느냐는 소리가 나옵니다.
여러 기관에 상호 견제시킨 거예요. 그래서 누구도 자기가 사정기관에 있으면서 전횡을 한다거나, 있는 사건을 덮는다든가 이런 것은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러다보니까 사헌부와 사간원을 양사라고 하는데 가장 센 기관이에요. 급수로 하면 높은 급수는 아니고, 지금 같으면 차관급이나 되죠. 권력자들이 이 기관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않겠어요? 권력자들이 이 양사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인사권을 독립시켜 놓았어요.
양사에 대한 인사권은 이조판서, 이조참판, 정승이 일체 개입을 못하게 했어요. 임금도 개입을 못해요. 이 인사권을 이조 전랑에게 줬어요. 지금으로 치면 행자부 국장쯤 되죠. 그러다보니 권력자가 이조전랑을 잡으려고 할 것 아니에요. 이조전랑 자리는 자기가 다른 자리로 갈 때 후임자를 자기가 추천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후임자를 추천하는 가장 큰 원칙이 뭐냐 하면 사론, 즉 선비들의 의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자기가 사정기관에 갔는데 어떤 권력형 비리 의혹이 있는데 수사를 안 한다고 그러면 , 저 비루한 놈 아니냐고, 이런 소문이 파다하면 '사론에 저촉된다' 이렇게 나와요.
선비들이 '저놈 저 기개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눈치나 보고 저런 놈 아니냐' 그 말 듣는 걸 자기 죽는 것보다, 감옥 가는 것보다 싫어하기 때문에 이 당시 사정기관 사람들은 차라리 감옥에 감으로써, 자기의 명예나 절개를 지키려고 하지, 권력자하고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제도도 만들어 놓았고, 그 제도 위에 이 기관에 가는 사람들은 대신이고 임금이고 거침없이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로 가게 구성이 되어 있는 거예요.
조광조 같은 경우가 개혁을 추진한 게 사헌부 대사헌 때 아닙니까. 대사헌이 지금의 검찰총창인데, 조광조가 개혁의 칼날을 휘두르니까, 조광조가 길거리로 나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가지고, 우리 주인 오셨다고 떠받들었다는 거죠. 일반 백성들이. 그러니까 결국 이건 각 개인의 처신이 그런 사람들이 가는 것도 있고, 그 다음에 제도적으로 절대 실체적 진실을 덮지 못하도록 하고. 수사권을 여러군데 나눠 놓아 가지고 상호 견제하게 한 우리 조상들의 절묘한 국정운영시스템의 결과로 조선시대 때는 사정기관이 자기네가 부패했다든가 그런 예를 500년 동안 찾기가 힘들어요. 예상 외로.
‘칼날 위의 역사’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황진환기자
▶ 우병우 사건은 인사 실패라고 볼 수 있는데, 인사 권한을 가진 자가 썩었으니, 결국 대통령이 측근 인선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로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측근의 전횡을 막을 수 있을까요?= 이것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500년을 이어온 제도를 봐야 되는데요. 여기서 우리가 뭘 구분해야 하느냐면 승지와 내시(환관)을 구분해야 해요. 우리는 그게 혼재되어 있어요 지금. 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 승지가 지금의 수석비서관들이 않습니까. 11명의 승지가 지금 같이 분야가 다 나눠져 있어요.
형조, 이조, 병조, 여섯 명의 승지가 다 분야가 있어요. 그런데 이 승지들은 자부심이 뭐냐 하면 나는 임금 개인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벼슬자리라고 하는 것은 하늘을 대신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임금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승지가 이 명령은 부당합니다라고 해서, 명령서를 다시 되돌려보내는 제도가 있어요. 복역이라고 해서 이게 공적인 제도에요.
지금은 내시인지 승지인지 구분이 힘들잖아요. 그런 것들은 내시의 역할들이지 조선에서는 내시들은 자기네가 선비가 아니니까 무조건 임금이나 권력자에 무조건 아부하게 되어 있는데, 조선의 선비들은 내시가 발호하는 것을 엄첨 경계합니다. 명나라는 동창(동쪽 창구)이 있습니다. 이게 내시들이 만든 기관인데, 사람들을 마음대로 가두고 고문하는데, 중국 역사를 보면 내시, 환관들이 발호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선 역사는 선비·관료들이 내시의 발호를 철저히 통제를 하고, 승지들은 임금 개인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거라는 그 개념이 아주 뚜렷한 사람들이 되는 거예요.
여기에 또 하나 제도가 뭐가 있느냐 하면 어쨌든 왕의 측근이기 때문에 상당한 권력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앞서 질문하고 공통된 게 뭐냐 하면 조선엔 탐장죄라고 있는데, 뇌물죄라는 얘기에요. 이 탐장죄에 걸리면, 예를 들어 진경준 같은 액수면 조선에서는 사형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탐장죄를 저지르면 장오안이라고, 뇌물 장자 오물 오자, 부패비리 벼슬아치 명단을 만드는데 이 명단에 오르면 그 자식들은 과거 응시 자체가 금지가 되요. 탐장죄에 한 번 올랐다고 하면 집안이 대대로 벼슬을 못하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자식을 생각해서 눈 앞에 먹으려고 하다가도 아이고 먹었다가 걸리면 내 자신이 죽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내 자식까지 자자손손 벼슬길이 끊기니까 상당히 자제하게 만든 거죠. 그런 제도를 만들어 놔야 하는데 한 개인에게 막대한 권력을 줘 놓고 나서 나중에 그게 어떤 사건으로 부각이 되면 그제서야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게 현실이죠.
사실 정운호, 홍만표 사건의 경우는 정운호가 감옥에서 판사출신 여 변호사를 안 때렸으면 다 묻혔을 사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마나 안 드러난 사건이 많겠냐고요. 우리가 이 제도 자체를 철저하게 손질을 해가지고 조선의 선조들이 만든 상호 견제, 그리고 부정부패는 끝까지, 자손대까지 영향을 미치는…연좌제라는 말이 나올지 모르지만, 이런 건 연좌를 해도 국민들이 뭐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사실은 이런 제도를 만들어 놨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측근이 전횡할 생각도 못했던 거죠.
개인 자신이 또 선비의식을 가지고 있고, 만약에 전횡하거나 하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는 제도적 장치를 같이 만들어놨기 때문에 조선조 500년을 오면서도 왕의 승지들이 전횡했다거나 잘 안 나타나는 건데요.
심지어 사헌부 관리들 같은 경우 고민하는 게 이런 거에요. 자기 친구 아버지기 세상 떠났는데, 내가 문상을 가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이걸 논의합니다. 문상을 가면 거기서 사람을 만나잖아요. 그 만나는 자리에서 청탁받을 게 아니냐. 그 조선 유교사회에서 자기 친구 부친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연히 갈 수밖에 없는 건데, 사헌부 관료가 되면 이거 가야되는지 고민하고 논의할 정도로 그렇게 개인의 처신을 조심했는데, 여기에 더해 조심하지 않을 수 없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놓고 권력을 준 거에요.
심지어 이들이 가진 탄핵권 중에는 풍문 탄핵권이 있어요. 풍문으로 들었어 하고 탄핵하면 물러나야 되요. 왜냐하면 그야말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헌부나 사간원 논리는 네가 처신을 잘못 했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도는 거다 하는 이야기예요.
‘칼날 위의 역사’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황진환기자
▶ 조세 문제가 심각합니다. 법인세 인하로 사내유보금이 넘치는 반면, 서민들은 세금부담이 높다고 아우성입니다. 조세 문제가 나라의 명운을 달리한 적이 있습니까?= 사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이유 중의 하나가 조세문제이에요. 왜냐하면 조세는 원래 기본이 많이 가진 자, 많이 버는 자가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이 적게 내거나 안 내거나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선은 거꾸로 된 측면이 있던 거죠. 예를 들어 공납 같은 경우 각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에게 바친다는, 처음엔 소박한 개념에서 시작했는데, 이 공납을 부과하는 과정을 보면, 처음에 마을 단위로 부과하는데, 그 마을이 인구수가 많은 마을이 있고, 적은 마을이 있잖아요. 그런데 큰 차이를 안 두고 비슷한 액수로 부과합니다. 거기에다 또 마을로 부과된 세금을 각 가호 단위로 각 집안마다 나누는데 이게 부자하고 가난한 자하고 별 차이를 안 둬요. 그러다보니까 이 가난한 사람들이 세금을 견디지 못해 가지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나오고, 도망가면 가족에게 지우니까 족징이라는 말이 나오고, 가족이 다 도망가면 이웃에게 씌우는 인징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이웃도 도망가니까 마을 전체에게 씌우는 동징이라는 말이 나오는 거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했던 거예요. 세금 부과 단위를 가가호호로 하지 말고, 농지 소유를 가지고 하자, 농지가 많은 사람은 많이 내고 적은 사람은 적게 낼 것 아니겠습니까? 당시에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양반, 사대부이지 않겠습니까. 벼슬아치들이니까 이들이 번번이 주동해서 반대하는 바람에 계속 안 되다가 임진왜란을 맞게 되죠.
병역도 마찬가진데요. 조선은 처음에 정도전이 개국 플랜을 짤 때는 사실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은 병역 의무를 다 지게 짜놨는데,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서 세조정권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 양반 사대부들을 잡기 위해서 차차 양반사대부들을 온갖 명목으로 병역을 면제시켜 주는 거예요.
그러다가 중종 임금때 군적수포제라고 해서 직접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대신에 1년에 두필씩의 베를 내는데, 16살부터 60살까지 일정액의 병역세를 내는 게 병역의무를 수행하는 건데, 이것을 하면서 적용대상에서 양반사대부를 제외시켰던 거죠. 그러니까 전쟁이 났는데 왜 백성들이 지배층인 양반 사대부들은 세금도 안 내고 군역도 면제되고, 이런 체제를 위해서 일반 백성들이 왜 싸우겠어요. 오히려 일반 백성들이 형조와 장예원을 불 지르고 일본군에 가담한 겁니다.
이때 조선이라는 나라는 망한 건데 유성룡이라는 재상이 나타나면서 아주 뿌리부터 뒤흔드는, 그야말로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한 거예요. 유성룡의 작미법, 그게 훗날 대동법이 되는 건데, 작미법은 농지단위로 세금을 받자는 거예요. 그 훈련도감과 속오군 같은 것을 만들어서 양반들도 다 군대 데려가고, 그러다보니까 백성들이 이제 나라가 비로소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해가지고, 다시 백성들의 마음이 돌아오면서 조선이 망했다가 회생하게 된 게 유성룡의 개혁정책 덕분인거죠.
▶ 개혁법이 다시 후퇴하는 경우도 있었는가요?= 나중에 임진왜란, 정유재란이 끝나면서 양반들이 유성룡을 끌어내리자는 데 암묵적 합의를 하고 그래서 서인들하고 북인들하고 연합해가지고 유성룡을 끌어내린 다음에 유성룡이 전시에 시행했던 그런 개혁입법들을 폐기하고 다시 전쟁 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잘못된 선택을 한 거죠.
▶ 지금 현재적 입장에 보면 난국 아니겠습니까? 세계경제가 어려운데 국가경쟁력을 잃어가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우리도 유성룡이 실시했던 개혁입법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죠. 당연히 유성룡 같은 그런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데, 중요한 건 유성룡이 당대 최고 지식인이예요. 그런 개혁입법들의 사상적 바탕이 뭐냐면 양명학의 뿌리를 두고 있는 건데요.
당시 조선의 벼슬아치들이 대부분 성리학자였다면 유성룡도 자기가 대놓고 양명학자라고 안했는데 자기가 양명학에 대해서 짤막짤막하게 글쓴 것을 보면 이 사람이 양명학을 상당히 받아들이는데, 성리학이라는 건 양반 사대부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한 거라면, 양명학은 농민들의 입장이 상당히 많이 반영된 철학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성룡은 깊은 역사적 지식·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그런 통찰력 끝에 이런 개혁입법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겠다고 생각해가지고 그런 개혁입법을 한 거예요.
사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지식인적 개혁정치가가 나와야 하는데 과연 유성룡 정도의 지식과 역사관이 결부된 지도자가 있느냐. 정도전도 마찬가지로 한낱 유배객의 신세였지만 정도전의 머리 속에 고려말에 이 체제를 뒤엎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 굶어죽을 거라는 생각에서 토지개혁을 통해서 조선을 개혁하지 않습니까.
그 토지개혁의 명분과 이런 방법들이 전부 다 정도전도 과거의 고전이나 역사 사례에서 뽑아낸 거예요. 우리가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이유는 조선총독부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서 무슨 개혁이론이 나오겠어요. 우리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봐야 개혁이론도 나오고 하는 거죠. 지금 우리는 정도전이나 유성룡이나 아주 깊은 지식에 기반한 개혁정치가가 필요한데 현재로서는 별로 안 보이는 거죠.
▶ 지식에 기반한 지도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네요.= 지식에 기반한다는 것은 책만 읽었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위안부 할머니 같은 경우를 보면 어떤 행보를 취하는 걸 보면 가장 정확한 행보를 취하시거든요. 이런 건 본인들의 경험에서, 어린이 때부터 자기가 고생한 그런 경험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이 있으니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문제가 현안이 되었을 때 문제제기가 가장 정확해요. 자기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결부된 정치가가 나와야 이 난국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죠.
‘칼날 위의 역사’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2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황진환기자
▶ 방산 비리도 끊이지 않고, 군내 구타 사고도 문제입니다. 이 책에서 독립군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쓰셨는데 무슨 얘기인가요?= 예를 들어서 군내 구타사고 있잖아요. 독립군 사이에서 구타라는 게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게 다 하나의 이 전선에 목숨을 건 하나의 인격체들이죠. 그러니까 독립군 사이는 비록 장군이 있고 소대장이 있지만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체들이에요. 구타 자체를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고 전부 다 일본군대의 잘못된 풍습에서 나온 것이죠.
또 하나 방산비리가 무기같은 걸 보면 독립군들이 그 당시 싸울 생각은 다 있는데 무기 구하기가 대단히 힘든 겁니다. 그래서 무기 한번 구하려면 그야말로 당시 시베리아 저쪽에 가면 체코군이 팔고간 무기들이 있거든요. 그 무기를 구하려고 산 넘고 물 건너 얼마나 험해요. 거기까지 가가지고, 또 낮에는 운반할 수가 없어요. 큰길로는 운반 못하고 밤중에만 산을 통해서 한사람이 수천리길을 걸어서 사가지고 운반하는 겁니다. 일본군하고 싸우기 위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그런 정신으로 무기를 구하고, 여러분은 이 총알 한방에 적 한명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훈련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죠. 이런 정신을 가지고 무기를 바라보는데 여기에서 무슨 방산 비리니 하는 생각 자체가 들어올 수도 없죠.
독립군 정신이라고 하면 또하나 이런 사례가 있어요. 한 의병장이 있었는데 의병에 실패했어요. 그래서 집안아 다 몰락합니다. 그 아들이 구걸을 합니다. 누가 그 아들을 알아보고 네가 누구 선생 자식 아니냐고 하니 맞습니다. 니네 집안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줘요. 그 아들이 가서 아버지한테 얘기하니까 '야 이것은 우리 쓰라고 준 돈이 아니다. 독립운동하라고 준돈이기 때문에 이건 의병활동에 써야 된다' 이러죠. 이런 정신으로 군을 정신무장시키면 거기서 부정부패니 방산비리니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거예요.
지금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여러문제를 이렇게 하다 보면 결론적으로 나오는 게 해방 이후에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의 건국정신으로 이 나라를 재건했어야 하는데 친일 청산을 실패하는 바람에 불행하게도 친일파들이 다시 정권을 많이 잡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팔아먹는데 가담했던 인간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이들에게 국가권력은 뭐겠어요. 사익을 추구하는 수단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이런 부정부패니 뭐니 하는 문제가 거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 미군 사드의 성주 배치 결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우리나라가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는데요, 과거 역사에서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광해군의 길, 인조의 길 칼럼도 하나 썼었는데.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당시 완전 세계화가 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가 세계 아닙니까. 이 동아시아의 패권이 항상 이 중국 한족들이 세운 나라들하고 북방 기마민족들하고 교체가 되는 거예요.
특히 청나라하고 명나라하고 교체되는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택하는 건데, 그런데 선조 때도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주둔하겠다고 요청한 적이 있어요. 선조와 신하들이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니까 유성룡이 '안됩니다. 외국군이 일단 여기 주둔하게 되면 그 뒤처리 문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 강력히 반대해가지고 명나라가 군사로 잠시 와 있는 게 아니라 주둔하겠다고 하는 것을 유성룡이 막죠. 안 막았으면 명나라 군사들이 그렇잖아도 횡포가 심한데 주둔해 있으면 그 폐해는 말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는 차차 몰락하고 청나라가 부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도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이면 미국 한 나라하고만 관계를 잘 하면 되는데 지금 중국이 무서운 기세로 올라왔잖아요. 러시아까지 해가지고 중국과 러시아가 한 축이 되었고, 미국도 한 축이 되었는데. 옛날에 동아시아는 북방 민족과 한족 사이의 교체라면, 지금은 미국이 쉽게 무너지지 않겠지만 옛날 같이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는 이미 지나갔다 이거죠.
이럴 때는 우리가 어떤 외교정책을 펴야 하는가. 광해군은 우리가 세상을 지배할 게 아니라면 이기는 쪽과 관계를 맺으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이거든요. 명나라가 청나라와 싸우기 위해서 조선에 군사를 보내달라고 했을 때 광해군은 '군사는 압록강까지만 보내가지고 거기서 기세나 올리고 말 것이지, 압록강을 건널 필요는 없다' 그런데 신하들이 엄청 반발해가지고 결국 강홍립을 보냈는데, 강홍립이 청나라를 만나서 '사실 우리가 파병한 것은 우리 임금의 뜻하고 다른 거다' 해가지고 무사했잖아요.
그런데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나서 인조정권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명나라에 대한 배신으로 낙인찍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나니까, 외교 정책을 급격히 숭명반청 정책으로 바꾸거든요. 이건 외교를 이념화한 거예요. 외교정책은 절대 이념화하면 안 되는 겁니다. 외교정책은 항상 나라의 국익, 나라의 실리를 제일의 가치로 삼아야 하는데, 숭명반청이라는 이념적인 외교정책을 가지고 사태를 대처하다보니까 정묘호란, 병자호란이 일어나가지고 나라가 망할 지경까지 갔는데 아마 정묘호란, 병자호란은 광해군이 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였어요.
외교정책을 이념화하면서 발생한건데, 지금 사드에 대해서 계속 의문을 제기하는 게 과연 사드가 과연 대한민국을 위한 거냐 미국을 위한 거냐 여러 의문들을 제기하고 있잖아요. 그것 자체가 벌써 잘못된 거죠. 명확하게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한 거라면 그렇게 큰 소동이 나지 않을 건데, 그런 의문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공청회도 하고 의견을 다 들어봐서 역시 사드를 배치해야 되겠다라는 결론이 나면 그 다음에 실현하면 되는데, 지금 누가 결정했는지, 그 결정하는 자리에 외교부 장관은 바지 사러 백화점에 갔다고 하니까, 이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구조가 그 라인이 전부 비밀에 싸여 있어요.
조선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없어요. 승정원의 승지하고, 사관이 모든 걸 기록한 다음에 그다음 날 조보로 그 전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 반포를 해요. 이 조선에서는 조보라는 걸로 임금이 누구를 만나서 국방장관을 만나서 사드 문제를 논의했는데, 아니면 담당 승지를 만나서 이런 문제를 논의했는데, 논의결과는 이렇다 다 공개를 해요. 조선에서는 밀실에서 결정하네 뭐하네 그런 말 자체가 나올 수 없게 되어 있는 거죠.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다들 밀실에서 누가 뭘 하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나라가 이 정도 덩치가 된 나라에서 어떤 국정 전반 현안을 다루는 시스템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거예요.
과연 국익 우선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는 건지, 이념의 관점에서 자꾸 저런 걸 바라보고 뭐 하는 건지, 중국과 척지어서 이익 될 게 하나도 없잖아요. 그건 어쩌면 마지막 카드인데. 마지막 중국에다 '야 그럼 너네가 북핵을 처리해라, 너네가 처리를 안 하면 우리가 사드를 배치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자' 이것을 중국 압박용으로 써야 하는데, 마지막 패를 보여줬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쓸 수단이 없는 거죠.
▶ 사드 문제를 보면서 전 국민적인 자기 주권의 표현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도 드는데요.= 그것이 중국에서 말하는 혁명이론이죠. 맹자가 말하기를 민중의 마음을 잡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잡으면 제후가 되고 제후의 마음을 잡으면 대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드는 성주냐 어디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에 배치할 거냐 말거냐 대한민국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자꾸 전자파가 안전하네 뭐네, 요런 지엽적인 문제로 가는데, 그렇게 따지면 서울 청계산에 하라 이거에요. 그렇게 안전하면 왜 청계산에는 못합니까. 강남에는. 왜 맨날 지방으로 가가지고 뭐 하는데, 그럼 강남사람들에게 청계산에 배치하자, 전자파 안전하다 그렇게 할 수 있겠냐 이거에요. 여기 청계산에는 못하고 다른 지역 가서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안전하다고 말하니까 누가 그걸 믿겠어요.
이건 전자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에서 신경쓰는 건 레이더 아닙니까.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건 미국과 중국이 전쟁하는데 또 다시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거죠.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전부 다 국제전이었지 않습니까. 그것이 또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를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봐야 되요 이건. 단순하게 이런저런 작은 전자파다 뭐다 그런 논리가 아니라 이게 과연 대한민국의 국익과 대한민국 전체의 안전이라는 차원에서 중국과 미국 사이에 이 문제에 우리가 끼어든 건지, 아니면 우리가 주체적으로 처리하는 건지 그런 걸 봐야죠. 이런 문제야말로 국익 뿐만 아니라 앞날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에 광범위한 여론을 다 청취해가지고 할 문제인데, 이걸 반대하면 왜 안보문제를 정쟁화하느냐 하는데, 그게 정쟁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존립차원의 문제로 이걸 다뤄야 한다고 보는 거죠.
▶ 이런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경제적으로나 외교 안보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중지를 모아갈 수 있는 대의 정치체제가 마련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합리적인 의사소통, 민의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절실한데요. 조선시대 연립정권 본보기처럼 과거 역사에서 배울만한 점들을 들려주시죠.= 광해군 초기에 업적을 이룬 것은 사실은 전부 다 서인과 남인과 북인 사이에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많은 업적을 다 이뤘어요. 연립정권이라는 것은 서로 상대방의 지분을 인정한다는 것이거든요. 우리나라 혼란스러운 것은 51%를 가졌다고 해서 나머지 49%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잖아요. 거기서 당연히 격렬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인데, 광해군도 초기에는 이러한 연립정권을 수립해가지고 많은 업적을 이뤘다가 나중에는 북인, 북인 중에서도 대북 한 당파에만 의지했지요.
사실은 당시 조선이라는 정치구도 자체가 특정한 한 당파가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가 엄청 혼란스러운 이 뿌리를 찾아보면 이 49%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데 있죠. 지난 대선에 박근혜 대통령을 찍지 않은 국민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가는 데 있지 않습니까.
조선의 예를 들어보죠. 남인, 남인 중에서도 청남이라는 정치세력은 요즘으로 치면 진보의 정치 세력이고, 노론 요즘으로 치면 수구에 가까운 정치세력인데 이 양자 사이에 정책 차별이라는 건 지금의 여야보다 훨씬 컸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든지, 구체적인 정책에서 백성을 중점에 둘 거냐 양반사대부를 중점에 둘 거냐 하는 이런 점에서 청남의 윤휴, 허목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들은 요즘으로 치면 아마 색깔논쟁에 휘말릴 정도로 상당히 민중 위주의 정치를 펼치게 되죠.
그러니까 우리 정치는 뭐냐하면 지난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했지만 사실 새누리당 안 찍은 분들 만나 보면 민주당이나 국민의당이 좋아서 찍었다는 분은 거의 찾기 힘들어요. 그건 뭐냐 하면 다 지향점을 상실한 것이거든요. 집권에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왜 집권을 해야 되고, 우리가 집권하면 무엇을 할 건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잖아요. 사드문제도 모호성을 다루겠다?(헛웃음) 모호성이라는 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국익을, 대한민국의 이익을 최대한 취하겠다고 하면 그건 모호성이라는 말이 되는데, 사드가 배치되는데 어떻게 당의 입장이 모호해가지고, 그런 당이 어떻게 차기에 정권을 잡겠다고 나올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예요.
자꾸 정치공학적으로 지금의 정당들이 바라보는데, 우리가 과거에 어쨌든 권위주의 군부독재 시절에도 그때는 어찌 됐든 정치가 시원시원했지 않습니까. 뭐냐하면 지향점이 뚜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지향점들이, 야당들도 도대체 지향점들이 뭘 지향하는 건지, 정치공학적으로 조금 우클릭해가지고, 우측 사람들 표 얻으면 집권하지 않겠느냐 이런 잔머리를 자꾸 펼친다는 거죠.
원래 정치라는 건 자기가 뚜렷하게 가치관을, 난 이거 할 것이다 하고 제시하고, 그걸 가지고 사람을 모아서 자기가 집권했을 때 그 가치관을 실현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그게 부족한 거고 그게 부족한 이유들이 보면은 이분들이 너무 단기간에 눈치들을 많이 보고, 욕 얻어 먹더라도 큰 전략적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 목표를 꾸준히 실현하다 보면, 그것이 옳다면 과거에 잘못 생각했던 사람들 다 저기도 옳았구나 하고 다 나오지 않습니까.
옛날 김대중이나 김영삼이나 얼마나 언론으로부터 공격당하고 뭐하고 했지만 결국에는 저 사람들이 한 길을 가는 그걸로 사람들로 모아 가지고 정권교체를 한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지금은 그런 어떤 큰 전략을 제시하고, 그 전략이 이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한 것이어야 하고, 그 전략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의 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거죠 지금. 그런 큰 정치 속에는 반드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시스템, 이 시스템을 가지고 미래로 갈 수 있겠는지 이걸 고민해봐야 되는 거예요.
▶ 세월호 사건 때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진상 요구가 높습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국정 최고 지도자의 행적,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보는 건데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조선에서는 국왕이 신하와 독대를 못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누굴 만나고 하는 것들을, 승정원의 승지, 그리고 사관들이 반드시 기록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굴 만났고, 무슨 내용의 대화를 나눴고, 이게 지금 필요하다는 거예요.
지금 대명천지에 누가 누굴 만났는지, 그 자체가 경호상의 비밀이라는 둥 무슨 비밀이라는 둥 다 비밀에 붙이잖아요. 누굴 만났는지 알 수도 없고. 조선의 권력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배울 게 굉장히 많습니다.
세계에 우리가 자랑할 만한 건데, 국왕이 정치를 하는 것은 하늘을 대신해서 정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정당당하고 공명정대해야 된다. 숨길 게 뭐 있느냐 이 얘기예요. 물론 국익에 관련된 민감한 이런 문제들은 승정원이 공지 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록으로는 반드시 남깁니다. 그래서 훗날이라도 저 시간대에 저런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이런 뭐를 했다든지 이런 뭐가 되는데, 지금은 그게 전혀 없다 보니까 누굴 만나서 뭘 했는지, 비단 저 7시간뿐만 아니라 대통령 개인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 제도를, 시스템 자체를 모든 걸 공개하는 걸 원칙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항간에 들리는 얘기로는 장관들이 대통령하고 얼굴 한번 맞추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못 만난다는 것 아니에요. 그게 말이 되냐 그거예요. 정례화해서 현안을 듣고, 서면으로 듣는 것하고 직접 얼굴 대면해서 하는 것하고 다르지 않습니까.
조선에서는 이게 전부 다 구조화가 되어 있어요. 왕이 아주 약식으로 좋아하는 경우도 있고, 한 달에 몇 번은 정식 조회를 해가지고 여러 신하들을 만나고 그다음에 누구 만나고 누구 만나고 하는 게 심지어 지방관 가는 사람까지 면담하는, 국왕의 일정이라는 것은 새벽부터 침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든 일정이 다 공개되고 기록이 되게 되어 있어요. 그 시스템을 제가 볼 때는 다시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비밀에 감춰야 될 국익에 관련된 부분은 불가피하게 공개하지 않더라도 기록으로는 반드시 남겨 놔야 나중에라도 아 저 때 누구 국방장관이 누굴 만나가지고 저런 대화를 나눴다는 걸 훗날에 정보의 가치가 상실되는 시점에는 공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그게 조선의 선조들이 만든 국정운영시스템이에요.
▶ 여담입니다만 왕들이 궁녀들을 만났을 때는 기록을 하는가요?= 그건 일과 시간 이후인 거죠. 일과 시간 내에는 꿈도 못 꾸는 거예요. 왕이 사실은 그렇게 궁녀들하고 활동하는 그렇게 한가한 직업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왕이 독서하는 걸 을람이라고 하거든요. 을람이 밤 10시에요. 이 시간이 되어야 국왕은 자기의 개인 시간이 비로소 저 때 생긴다는 얘깁니다. 자기 개인 독서할 시간도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왕 하면 마음대로 놀고 그러는 것으로 아는데, 조선이라는 나라가 유교정치 시스템을 딱 갖춰놨기 때문에 국왕에게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한 나라에요. 나중에 숙종 무렵에 가면 그런 폐해가 나타나죠.
▶ 로스쿨 입학, 대학입학사정관제에서 현대판 음서제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과거에 음서제 폐해와 극복 방안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조선은 음서제도가 있긴 있습니다만,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사람은 진급하는데 상당한 제한이 있었어요. 그래서 음서로 진출한 사람들은 벼슬을 하면서 나이를 먹더라도 과거를 보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요. 이품 이상 벼슬아치 자제 중 한명에게 음서 진출 자격을 주는 건데, 너는 그 집안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기득권을 누린 것이기 때문에 그 기득권에 벼슬까지 자동으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한 명은 음서 진출 기회를 주지만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는데 상당한 제한이 있고, 선비들 사이에서도 음서다 해서 관직 임명할 때 '음'자를 써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정식 과거 출신자가 아니고 음서 출신이라고 하는 게 꼬리표가 붙어 다니기 때문에 나이 먹어도 이 사람들이 계속 과거를 봐가지고 음서라는 꼬리표를 떼려고 노력을 하는 거죠. 그만큼 조선이라는 사회는 기본시스템 자체는 정도전이 짤 때 실력 위주로 많이 짜놨어요.
후대에 와서 벌열화되고 세도정치화 되면서 많이 잘못 됩니다만, 지금 우리 사회의 로스쿨이니, 입학사정관제니 하는 것들을 보면 결국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금수저들이 더 쉽게 한국사회의 돈 이외에 다른 것까지, 권력까지 잡겠다는 그런 제도가 되어버렸잖아요. 한국은 저렇게 가면 나중에 어떤 문제가 발생 하느냐 하면 직접 계급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제가 강연을 다니면서 보면 어떤 직종을 불문하고 이제 임계점에 다다랐어요.
이 아래 사람들이 지금은 이 흑수저들이 이 시스템 내에서 뭐 한번 해볼까 하다가 그런 것들이 제도화가 되면 금수저들이 저런 걸 통해가지고 국가권력에 쉽게 다가가고 정권을 장악하고 하는 것이 제도화되면 그 다음에 반드시 다수의 흑수저의 입장에 서는 지식인들이 나오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곧바로 체제 자체를 뒤엎어야 한다는 그런 혁명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게 역사에서 좋든 싫든 흐름이 그렇게 가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선진국이 되었건 모든 나라들이 자유민주주의체제라는 자체가 부르주아의 기득권을 인정하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동의에 의한 체제로 만들어가는 속에서 그 동의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서 특권화하게 되면 그다음에 우린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게 되면 그다음에는 뭐 옛날같이 거리에 뛰쳐나와서 대통령 직선제 이 수준의 얘기가 아니게 되어 있어요.
중국역사 같은 경우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국민의 마음을 얻으면 황제가 된다고 했듯이 그걸 갖다 정치권에서 이런 불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권력과 정치권에서 잘 조화하고 제도화를 해야 하는데 지금 그 기능이 거의 상실되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뭐 음서제를 해가지고 500년동안에 고위층까지 올라가는 사례가 아주 극소수 손에 꼽을 정도로, 다 과거라는 실력을 거친 사람만이 올라갈 수 있게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시스템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500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시스템 덕분인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홍경래난 같은 경우 홍경래가 과거 와보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 쳤는데 나중에 방 붙은 것 보니까 자기는 없고 저거 다 짜고 하는 거야 이러니까 내가 이 세상을 때려 엎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가서 난을, 서북항쟁을 일으킨 것 아닙니까.
▶ 김영란법에 대한 위헌 심판 청구에 대한 결정이 내일(28일) 나오는데요. 역사적 관점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이 인터뷰는 그 결정이 나기 하루 전에 이뤄졌다)= 제가 예전에 김영란법을 찬성하는 칼럼을 몇 번 썼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재판을 받아 보니까 그 때와 입장이 달라졌어요. 과연 이 사법시스템 가지고 김영란법을 운용할 수 있겠는가 회의가 듭니다.
검찰이 문제를 안고 있는데 그 검찰로 하여금 기소권을 광범위하게 행사할 수 있는 김영란법이 시행될 경우 악용될 소직 많다는 거죠. 저는 김영란 법이 위헌으로 나오든 합헌으로 나오든 저 법 자체는 필요한데 저 법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 전반을 손을 봐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같이 자의적으로 검찰이 기소하고 싶으면 기소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수사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말고, 이런 사법 시스템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국민들이 바라볼 때 이 상호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반드시 분리시켜 놔야 되고, 그리고 수사권도 금융감독원 등 여러 전문 기관에 분산시켜야 합니다.
국가 권력을 상호 견제시키고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 그런 사법 개혁이 수반되지 않으면, 제가 재판 한번 해보니까 폐해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말도 지금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김영란법의 수사권 기소권은 제3의 별도 사법기구를 만들어서 처리하게 한다든지 보완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수사권과 기소권을 같이 한 나라가 우리밖에 없잖아요.
일본 조선총독부가 1912년에 만든 조선형사령에서 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검찰에 다 주는 것이거든요. 그게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많은 적폐를 낳고 있죠. 지인이 영국의 법대 교수에게 한국 검찰이 갖고 있는 기소권과 수사권을 같이 갖고 있다고 하니까, 이해를 못하더라는 거예요. 그러고도 인권이 보호가 되느냐며. 우리는 1912년 이래 지금까지 100년동안 비정상시스템으로 왔기 때문에 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아는데, 대단히 비정상이에요.
그리고 기소권을 가지고 있는 검찰이 정보수집권까지 가지고 있는데, 이건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에요. 그래서 이 틀을 수사권, 기소권을 먼저 분리하고 조선의 선조들같이 수사권을 여러 군데로 분산시키고, 당연히 공수처 만들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