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 (사진=연합뉴스)
"주민만 20만 명인데, 이 양반(백선엽)은 '이(지리산)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라고 했다."
'지리산대토벌작전'에 투입된 백(白)야전전투사령부(백야사)의 작전 참모였던 공국진 대령의 증언이다.
독립군 잡는 '간도특설대' 활동으로 국립 서울현충원 안치 논란이 일었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은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의 '빨치산'을 토벌한 백야사의 사령관이었다. 백선엽이 이끈 백야사가 포로로 잡거나 사살한 이들의 상당수가 '민간인'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9·28수복으로 전선이 북상하자, 영·호남의 후방 치안을 위해 1950년 10월 11사단을 투입했다.
이승만 정부는 11사단에 이어 1951년 11월 중순 미8군에 다시 한번 '빨치산' 후방 토벌을 청원했다. 이에 미8군은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백야사에게 '지리산대토벌' 작전을 지시했다.
1951년 11월 25일 대구에서 전주로 이동해 온 백야사는 전북 남원에 사령부를 꾸렸다. 예하에는 수도사단, 8사단,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 등 군과 경찰이 합동했으며 부대 병력만 총 3만여 명에 달했다.
백야사는 1951년 12월 2일 토벌작전에 돌입했고 다음해 3월 14일까지 4차례 토벌작전을 펼쳤다. 백선엽은 지리산 정상을 향해 포위망을 좁히면서 중산간 마을을 초토화하는 '토끼몰이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백야사는 6606명을 사살하고 711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진실화해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보고서) 미군 기록에 따르면 9천여 명을 사살했다. 국방부는 제4차 토벌을 제외하고 사살 7737명, 생포 7993명, 귀순 506명으로 기록했다.
백야사의 지리산지구 포위 작전도. (사진=정찬대, 국민 만들기의 폭력적 동화 갈무리)
그러나 백야사에 의해 포로로 잡히거나 사살된 1만 5천여 명 중 상당수는 민간인이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백야사의 포로와 사망자는 예상했던 빨치산 규모 4000여 명의 4배가 넘는다.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피란했던 일반 주민, '비무장 입산자'가 많았다는 뜻이다.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정찬대 연구원은 "지리산에 1만 5천여 명 규모의 빨치산이 있을 수 없다"며 "1951년도 후반엔 지방 좌익들이 많이 토벌된 상태"라고 말했다.
이어 "광주중앙포로수용소의 증언을 종합하면 입산자의 상당수는 민간인이었다"고 덧붙였다.
또 정 연구원은 "백야사 작전의 민간인 피해와 집단 학살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백선엽을 조명하는 데 있어서 백야사 작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백야사의 작전 참모였던 공국진 대령은 "주민만 20만 명인데, 이 양반(백선엽)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라고 했다"며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 한다'고 했으나 그렇지 못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2005년 제정된 과거사정리법은 한국전쟁 전후 이념으로 발생한 여러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70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백야사에 의한 민간인 피해는 아직 진상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