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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단독]조작간첩 피해자 허간회씨는 고문 수사관 '옆집'에 산다 (계속) |
1981년 4월 18일 새벽.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주경찰서 정보계 형사들이 김평강(당시 41세)씨 집에 들이닥쳤다. 양치추씨는 그날 연행된 남편 김씨의 얼굴을 6개월이 지나서야 다시 볼 수 있었다. 김씨는 '조총련계 간첩'이, 양씨는 '간첩 각시'가 된 뒤였다.
허간회(당시 43세)씨는 이틀 뒤인 4월 20일 연행됐다. 김씨와 허씨는 그해 5월 24일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한 달 넘도록 불법 감금됐다. 구타와 길게는 5일 동안 잠 안 재우기, 물고문 등 가혹행위가 이어졌고 끝내 허위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생계를 위해 1969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에 있던 10년 동안 가방공장, 철근공장, 건설현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일본 정착 초기 조총련계 인물 집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귀국 후 그걸 빌미로 간첩 누명을 씌울 줄은 당연히 꿈에도 몰랐다.
재판 과정에서 고문에 따른 허위 자백이라고 수없이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했고, 1심은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김씨 아내가 일본에서 사귄 거류민단계 재일동포를 증인으로 데려온 영향으로 2심에서는 그나마 징역 7년으로 감형됐다.
사법부가 이를 바로잡는 데는 꼬박 33년이 걸렸다. 김씨와 허씨는 2014년 광주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11일 제주 일도이동에서 만난 조작간첩 피해자 김평강(80)씨 부부. (사진=김태헌 기자)
조작간첩 피해자 김평강씨 부부 약혼사진. (사진=김태헌 기자)
◇수십년 만에 '가해자' 직접 마주한 조작 피해자양씨는 한동안 갈비탕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숫가락만 휘젓던 양씨 얼굴의 주름이 더 짙어졌다. 잠시 후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이 갈게요. 같이 가서 보고 싶어요."
지난 10일 제주의 한 허름한 식당에서 조작간첩 피해자 김평강씨 부부를 만났다. 어느날 새벽 집에 들이닥친 경찰 이야기부터 30일 넘게 이어진 가혹한 고문 수사, 장장 7년에 걸쳐 부부가 함께 견뎠던 김씨의 옥살이까지. 두 사람은 덤덤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아픈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갔다.
피해자 인터뷰를 마치고 근처에 있던 고문 경찰관 집에 찾아갈 계획이었지만, 피해 당사자와 함께 가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알겠다고 답했다. 생각만으로도 아픈 기억을 남긴 가해자의 얼굴을 수십년 만에 마주하려는 그 용기를 무슨 자격으로 꺾을 수 있었을까.
지독히 맑았던 제주의 하늘을 뒤로 하고 양씨가 골목길을 걸었다. 엉치뼈 수술을 앞둔 양씨는 지팡이를 짚고도 절뚝거렸다. 도보로 5분 남짓 거리인데도 그는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거친 숨을 연달아 내쉬었다.
수사관 A씨 집 앞에 도착하고도 들어가길 한참을 주저하던 양씨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간첩 각시 왔수께 간첩 각시 왔수께."
문을 열고 나온 A씨를 양씨는 첫눈에 알아봤다. "그래도 (얼굴이) 변함이 없다. 어디 잘 살았수까. 나 보면 알아보겠지?" A씨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글쎄 얼굴이…가망가망 한게."
가해자와 피해자 기억은 달랐다. A씨는 수사 과정에서 고문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두 고문시켜 놓으니께 사람 병신 다 되고 아파 누웠수"라는 양씨의 말에 A씨는 "고문은 무슨"이라고 했다.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은 없느냐고 묻자마자 A씨 말이 빨라졌다.
"무사 고문게? 그런 건 없었고 그 아저씨가 양심적으로 (혐의를) 이야기 했수다. 그것 뿐이고. 단지 우리가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 수사 기간이 좀 길었수기.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공안 사범인 경우 좀 오래 걸렸어.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제 와서는 사실 미안하게 생각해요."
양씨 언성도 덩달아 높아지자 A씨는 손사래를 치며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그만 합시다. 싸우고 싶지 않으니."
조작간첩 피해자 허간회씨는 조작수사관 옆집에 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0일 제주 일도이동에서 만난 허간회씨 부부. (사진=김태헌 기자)
제주 일도이동의 한 주택가. 허간회씨 집(오른쪽 큰 원)과 조작 수사관 A씨(왼쪽 작은 원) 집이 한 길에 붙어있다.(사진=김태헌 기자)
◇"지금이라도 잘못했다 해야할 것 아니오"…사과 없는 '그들'김씨와 함께 간첩 누명을 쓴 허간회씨도 불법 감금 상태에서 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았다. 잠을 재우지 않은 것은 물론, 다리 틈에 나무를 끼우고 비틀어대는 고문에 정신을 잃고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고 했다.
다른 기막힌 사연이 있다. 억울하게 잡혀가던 그때도 지금도 허씨 부부가 수사관 A씨의 바로 옆집에 살고 있다는 것. A씨 집과 허씨 집은 한 블록 안에 있다. 그야말로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다.
조작 가해자와 '이웃'으로 사는 허씨는 어떤 마음일까. 허씨는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A씨가 자신을 직접 고문한 적은 없다고 하면서도 당시 조작 수사에 참여했던 경찰이라는 점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허씨는 법원에서 무죄를 받은 2014년 이후 오며가며 A씨를 종종 마주쳤지만 단 한 번도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고 토로했다. "(A씨는) 지금도 반성하는 기미가 하나도 없어. 지금이라도 만나면 '그때 세상이 그런 세상이라 좀 잘못했다'고 해야할 것 아니오. 근데 절대 안 해. 순 악질이야."
김씨 아내 양씨는 김씨가 옥살이를 하던 시절 시내버스에서 우연히 가해자를 마주친 적이 있다. 남편이 경찰 수사를 받을 때 제주경찰서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던 양씨는 버스에서도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막 고함을 치는데도 한마디도 답을 못하고 저 한라산만 쳐다보더라고. '너도 고문시키면 우리보다 더한 먼지가 나올 것'이라고 막 쏴 붙였지. 그때는 겁도 없었어."
김씨가 2심 재판부가 있는 전라도 광주로 옮겨지자, 아내 양씨도 그를 따라 광주로 향했다. 자식들을 제주에 둔 채 한겨울 이름모를 여관방에 누운 양씨는 억울함에 차마 잠들지 못했다.
"나 그때 몸에 불이 붙었었어. 화가 자꾸 올라와서." 양씨는 무등산 어귀에 있는 절에 들어가 꼬박 3개월을 지내며 마음을 달랬다.
◇반성 없는 가해자와 고통 받는 피해자를 마주하다상당수 조작 수사 피해자들은 국가기관의 외면 속에 오늘날에도 사법부와 싸우고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00년 1월부터 2019년 6월까지 재심을 통해 간첩 혐의 무죄를 받은 사람은 모두 301명이다.
그나마 이들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조사로 재심 개시 결정을 받은 경우다. 전문가들은 법원으로부터 재심 결정을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피해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기회조차 받지 못한 셈이다. 과거 수사기관의 조작을 통해 간첩 누명을 쓴 이가 정확히 몇명인지에 대한 통계조차 없다.
반면 가해자들은 어땠나. 국가로부터 간첩 검거 공로로 훈장을 받고 1계급 특진을 하며 명성과 부를 누렸다.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간첩 검거 공로로 순경부터 경감까지 총 4번 특진했다. 1979년 청룡봉사상 충상과 국무총리 표창, 옥조근정훈장 등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상훈만 18개에 달한다.
법원의 재심 판단으로 그가 잡아들인 간첩 상당수가 조작에 따른 '가짜 간첩'으로 밝혀졌지만 그가 받은 상훈 대부분은 취소되지 않았고, 특진도 그대로다. CBS노컷뉴스는 이점에 주목했다. 시민단체 '평화박물관'과 진실화해위 등 국가기구에서 조사한 사건들의 원심 판결문과 재심 결정문, 재심 판결문을 일일이 분석·조사했다.
이를 통해 이근안을 포함, 조작간첩 사건 공로로 특진한 경찰 소속 대공 수사관 5명을 특정했다. 우리는 경찰을 포함한 국가 권력기관이 만시지탄이라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단초를 제공하고자 3회에 걸쳐 취재 내용을 보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