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석탄화력발전소 특별 노동안전조사위원회' 현장 점검 당시, 고 김용균씨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난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 작업 현장의 모습. (사진=박하얀 기자)
"정규직 전환은 둘째 치고 임금, 처우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습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2018년 12월 10일 컴컴한 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일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24살 비정규직 하청업체 노동자의 죽음으로 얻어낸 약속이었다.
고 김용균씨 사고 후 꾸려진 특별노동안전조사위원회(특조위)는 지난해 8월 22개 권고안을 냈다. 정부와 여당은 넉 달 뒤인 그해 12월 용균씨가 했던 연료·환경설비 운전 업무의 직접고용 등을 담은 '발전산업 안전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발전소 하청노동자들의 처우는 달라졌을까. 현장은 안전한가. 특조위가 낸 권고안을 바탕으로 충남 태안·보령화력발전소, 경기 지역의 화력발전소 등 현장 노동자 3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해 4월 '석탄화력발전소 특별 노동안전조사위원회' 현장점검 당시, 한 특조위원이 고 김용균씨 산재 사망 사고가 난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 설비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진=박하얀 기자)
◇ 정부의 '직고용' 약속 1년 후…"여전히 불안정한 하청 노동자"故김용균씨의 산재 사망 사고의 구조적 원인 등을 조사한 특조위가 지난해 8월 발표한 권고안의 첫 번째 항목은 '외주화 근절'이었다.
특조위는 컨베이어벨트에 의해 이뤄지는 연속 공정에서 원청과 하청으로 나뉜 구조가 책임 공백 상태를 만들어 더 큰 위험을 낳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연료·환경설비 운전 업무는 발전사들이 하청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고, 경상정비 업무는 한국전력공사 자회사를 통해 '재공영화'하라고 권고했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특조위 권고안에 대한 응답으로 지난해 12월 '발전산업 안전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 방안에는 △연료·환경설비 운전 분야는 하나의 공공기관을 만들어 발전5사 정규직화 대상자 직접고용 △경상정비 분야는 노·사·전문가 협의체에서 고용안정 개선 방안 마련 △하청 노동자에게 적정 노무비 지급 보장 등이 담겨 있다.
1년이 지났다. 연료·환경설비 운전 분야 직접고용은 이뤄지지 않았고, 경상정비 업무의 재공영화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현장에서는 '3개월짜리 아르바이트생',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들은 "계약이 끝났는데 발전사는 정규직 전환이 언제 될지 모르니 3개월씩 계약을 연장한다",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있고, 발전사는 가이드라인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고 성토했다.
정부가 '외주화 유지' 방침을 밝힌 경상정비 분야는 노·사·전 협의체가 하청 노동자들의 고용안정 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고정 계약 기간 6년에 최대 3년까지 계약 기간을 연장하는 안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A씨는 "위험의 외주화 방지 원칙하에서 논의해야 하는데, 다수 논리로만 가고 있다"며 "20대 청년 노동자들의 6년 후 고용 안정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경쟁입찰에서 안 되면 또 옷을 바꿔 입어야 한다. 한 자리에 터전을 못 잡고 떠도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4월 '석탄화력발전소 특별 노동안전조사위원회' 위원들이 3일 사고가 난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 석탄운송 설비를 점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여전히 원청 눈치…100% 안전해졌다고 말 못 해요"최근 5년 동안 발전5사의 산업재해 사망자 20명 전원(100%), 부상자 348명 가운데 340명(97.7%)이 사내 하청노동자였다.
특조위 권고안과 정부 대책 발표 이후에도 현장에는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보령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B씨는 "사고가 나면 잠깐 신경 쓸 뿐, 시간이 지나면 '안전하지 않은 작업이 아니냐'고 말해도 '조심해서 하면 되지', '빨리 하고 내려오라'는 식"이라며 "재하청 노동자들은 보복성 작업, 해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현장에서 문제를 제기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앞서 특조위는 권고안에서 '노동자들이 설비 개선을 요구하면 실제 안전 시스템에 적용되고, 다시 현장 주체들과 피드백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짚었다.
B씨는 "현장에선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하면 (설비 등을) 가져가긴 하는데, 어떻게 진행되는지 피드백이 전혀 없다"며 "실제로 (노동자 요구로) 안전 펜스를 설치했지만, 일하기 불편한 형태로 만들어서 설치하고 더 힘들어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석탄회 정제·처리설비 쪽은 위험한 작업인데도 2인 1조 작업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특조위가 내놓은 권고안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이행점검단은 꾸려지지 않았다. 앞서 특조위원들은 민관 합동 이행점검단을 꾸려야 한다고 했지만, 정부는 국무조정실이 주관하는 '이행점검회의'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점검회의는 임의적인 회의체다.
이 같은 시스템 공백으로 현장 안전에 대한 정부와 노동자들 간의 인식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B씨는 "얼마 전 국무조정실 이행점검회의에서 확인한 결과 22개 권고안 중 10여개 항목이 (이행) 완료됐다고 했는데, 우리가 보는 건 2가지 정도밖에 (이행)안 됐다"고 전했다.
정부와 원청의 무관심 속에, 일부 발전소에서는 노조를 중심으로 자체적인 안전 대책 마련에 나섰다. 현장 인력 가운데 1명을 사장 직속의 안전 통제원으로 선임하는 방안 등이다. 노조 관계자는 "원청 등이 생각해내야 하는 건데, 노동자들이 스스로 지키자는 마음인 게 씁쓸하다"고 했다.
'석탄화력발전소 특별 노동안전조사위원회' 위원들이 지난해 4월 김용균씨가 숨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9·10호기 석탄운송 설비(컨베이어벨트) 내부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지켜보기만 하는 정부…더 이상의 죽음은 막아야"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때부터 '노동하기 좋은 사회'를 공언했다. 2018년 신년사에서는 산재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산재 사망자를 2017년 964명에서 2022년 505명까지 줄이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도 내놨다.
지난해 산재 사고 사망자 수는 855명으로 2018년 971명보다 줄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감소 추세를 보이지는 않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일하다 사고로 숨진 노동자는 660명으로 작년 동기 대비 7명(1.0%) 줄어드는 데 그쳤다.
현장 노동자들은 정부가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도 전날 고 김용균씨 2주기를 맞아 석탄화력발전소 필수유지 업무에 종사하는 하청노동자의 생명·안전과 노동인권 개선을 정부·국회 및 발전회사에 권고했다.
발전소 노·사·전 협의체에 정부를 비롯한 핵심 기관이 빠져있는 것도 문제로 꼽혔다. B씨는 "실질적 권한이 없다는 게 문제"라며 "한전이 민간회사인 한전산업개발 주식을 매입해 공공기관화 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주식매입을 해야 하는 한전은 전원협의체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만 지나고 결정이 안 나는 상태다. 정부에서 확실한 가이드라인이나 오더가 나와야 하는데, 정부는 '우린 하라고 했으니 나머지는 협의체에서 알아서 해라' 이런 식이다"라고 덧붙였다.
공공기관인 발전사에 예산을 편성하는 기획재정부 등의 책임도 크다고 짚었다. B씨는 "발전사쪽은 기재부에서 하청업체에 드는 사업비를 늘려줘야 지급 여력이 생긴다는 입장인데, 기재부가 올려주지를 않는다"며 "이 같은 상태에서는 처우를 개선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경기지역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C씨는 "정규직과 같은 대우, 복지, 임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원·하청 구조의 문제다"라며 "재하청을 주는 등 쉽고 싸게 (사람을) 쓰려고 하다 보니 계속 사고가 난다. 정부도 다 알고 있지만, 결국 돈 때문에 결정을 못 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용균씨와 같은 업무를 하고 있는 한 노동자는 "젊은 친구의 숭고한 목숨으로 그나마 이렇게 현장이 밝아지고 설비가 개선되고 현장이 조금이라도 안전해졌다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며 "그의 죽음이 말하는 '위험의 외주화 금지'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