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약 180일간의 직권조사 끝에 '박원순 성추행·성희롱' 의혹을 사실로 인정했다. 경찰·검찰이 박 전 시장의 사망을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리하면서 '피해자의 일방적 주장'으로 묻힐 뻔했던 사건이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의 조사를 통해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된 셈이다.
다만 피해자가 주장한 서울시 관계자들의 '성추행 방조'나 '피소사실 유출' 등에 대해 명확한 사실관계를 밝혀내지 못한 것은 인권위 조사의 한계로 꼽힌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이 2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전원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이한형 기자
◇인권위, '박원순 성희롱·성추행' 인정 배경은?인권위는 25일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업무와 관련하여 피해자에게 행한 성적 언동은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른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다"며 "서울시 등 관계기관에 피해자 보호 및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 권고 등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인권위가 박 전 시장의 성추행·성희롱 사실을 인정한 주된 근거는 피해자 휴대전화에서 나온 증거와 피해 당시 피해자로부터 이 사실을 들었거나 메시지를 직접 봤다는 참고인들의 진술 등이다.
인권위는 "서울시청 시장실 및 비서실 현장조사를 비롯해 피해자 면담조사(2회), 서울시 전·현직 직원 및 지인에 대한 참고인 조사(총 51명), 서울시·경찰·검찰·청와대·여가부가 제출한 자료 분석, 피해자 휴대전화에 대한 디지털 포렌식 감정 등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건의 실체를 밝히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성적 언동의 사실 여부와 관련해 피해자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등 증거자료 및 박 시장의 행위가 발생했을 당시 이를 피해자로부터 들었다거나 메시지를 직접 봤다는 참고인들의 진술, 피해자 진술의 구체성과 일관성 등에 근거했다"며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고 밝혔다.
다만 "박 전 시장 사망으로 인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특성을 감안해 사실 여부는 좀 더 엄격하게 판단했다"며 "피해자의 주장 외에 행위 발생 당시 이를 들었다는 참고인의 진술이 부재하거나 휴대전화 메시지 등 입증 자료가 없는 경우 사실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피해자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자료와 피해자의 진술, 그리고 이를 직접 보거나 들었다는 참고인의 진술을 토대로 피해자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인정된 박 전 시장의 행위는 '늦은 밤 시간 피해자에게 부적절한 메시지와 사진, 이모티콘 보냄', '집무실에서 네일아트 한 손톱과 손을 만진 것'이다.
더불어 박 전 시장과 피해자의 '불평등한 직장 내 권력' 또한 성희롱 인정의 근거가 됐다. 피해자는 위계관계에 의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시장의 샤워 전·후 속옷 관리, 약 대리처방, 혈압 재기, 명절 장보기 등 사적영역에 대한 노무까지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인권위는 "성희롱은 권력 관계에서 발생한다. 통상적으로 권력의 우위에 있는 남성이 여성에게, 직장 내 높은 지위에 있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성희롱을 행사하는 양상으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이어 "박 시장은 9년 동안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차기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반면 피해자는 하위직급 공무원"이라며 "두 사람이 권력관계 혹은 지위에 따른 위계관계라는 것은 명확하다. 이러한 위계와 성역할 고정관념에 기반한 조직 문화 속에서 성희롱은 언제든 발생할 개연성이 있으며, 본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성희롱의 인정 여부는 성적 언동의 수위나 빈도가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업무관련성 및 성적 언동이 있었는지 여부가 관건"이라며 "이 사건의 경우 인정사실만으로도 성희롱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하다고 봤다"고 밝혔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을 비롯한 상임위원들이 2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전원위원회를 진행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성추행 방조', '피소사실 유출'은 진상규명 못해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과 함께 제기된 핵심 의혹 중 하나는 서울시 관계자들의 '성추행 방조' 여부다. 앞서 피해자 측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성고충으로 인한 전보 요청을 20명 가까이 되는 전·현직 비서관에게 말했다. 그러나 시장을 정점으로 한 업무 체계는 침묵하게 하는 위력적 구조였음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이에 해당 의혹을 조사한 인권위는 "전보와 관련해 피해자가 비서실 근무 초기부터 비서실 업무가 힘들다며 전보 요청을 한 사실 및 상급자들이 잔류를 권유한 것은 사실로 보인다"면서도 "그러나 동료 및 상급자들이 피해자의 전보 요청을 박 시장의 성희롱 때문이라고 인지했다는 정황은 파악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다만 "참고인들이 박시장의 성희롱을 묵인·방조했다고 볼만한 객관적 증거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지자체장을 보좌하는 비서실이 성희롱의 속성 및 위계 구조 등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며 "두 사람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라고만 바라본 낮은 성인지 감수성은 문제라고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피소사실 유출 의혹'에 대해서도 "경찰청·검찰청·청와대 등 관계기관은 수사 중이거나 보안 등을 이유로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고, 박 시장의 휴대전화 디지털 포렌식 결과는 입수하지 못했다"며 "유력한 참고인들 또한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답변을 하지 않는 등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 이로 인해 피소사실이 박 시장에게 전달된 경위를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이는 인권위가 직권조사에 착수한 당시부터 나왔던 '한계'로 꼽혔다. 인권위는 수사기관과 달리 압수수색 등 강제조사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통상 당사자의 자발적 진술이나 임의제출된 자료에 의존해 조사를 진행한다.
이 같은 한계가 드러난 대표적 사례로 2년 전 서지현 검사의 '미투'로 촉발한 검찰 내 성희롱·성추행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직권조사를 꼽을 수 있다. 당시 검찰 전반의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직권조사 하겠다고 나섰지만, 피해자들이 조사를 원하지 않거나 피해를 부인한다는 점 등을 이유로 진상 규명을 하지 못한 바 있다.
인권위는 강제수사권이 없어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자료 제출을 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처분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이번 사건을 조사하며 과태료 처분이 된 사례는 1건도 없던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 관계자는 "모두 피조사자가 아니라 참고인 신분이기 때문에 과태료 처분 등 해당 사항이 아니다"고 말했다. 사실상 이번 사건에서 피조사자는 사망한 박 전 시장 한 명 뿐이었다.
11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를 찾은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박종민 기자
◇'성추행' 아닌 '성희롱' 표현, 이유는?인권위는 박 전 시장의 '성적 언동' 뿐만 아니라 '신체 접촉'까지도 가해 사실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직권조사 개시부터 현재까지 '성추행'이 아닌 '성희롱'으로 표현해왔다.
인권위는 "(박 전 시장이) 집무실에서 네일아트 한 손톱과 손을 만졌다는 피해자의 주장은 사실로 인정 가능하다"면서도 "이와 같은 박 시장의 행위는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성적 언동으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적시했다.
인권위는 '성희롱'에 위력에 의한 성추행·성폭력·강제추행·성적 괴롭힘 등이 모두 포함된다는 입장이다. 인권위법에 따르면 '성희롱'은 '업무·고용·그 밖의 관계에서 공공기관의 종사자·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그 직위를 이용하거나, 업무 등과 관련해 성적 언동 등으로 성적 굴욕감·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인권위는 이번 직권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서울시 등 관계기관에 피해자 보호 및 재발 방지를 위한 개선 등을 권고했다. 서울시에는 피해자에 대한 적극적 보호방안 및 2차 피해에 대한 대책 마련과 비서실 업무 관행 개선, 성희롱·성폭력 예방 및 구제 제도를 개선하라고 촉구했다.
인권위는 "이번 조사에서 파악한 바로는 피해자는 서울시장 비서실에 근무하는 4년 동안 성희롱 예방교육을 한 번도 받지 않았고, 시장실 직원 성희롱 예방교육 이수율도 30%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였다"며 "피해자와 참고인들은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절차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서울시는 전 직원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절차에 대해 숙지하도록 조치할 필요가 있다"며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의 모든 단계에서 피해자 보호 원칙이 견지되고 2차 피해가 중요한 이슈로 다뤄질 수 있도록 특화하여 동료, 관리자, 가해자 및 피해자 등 당사자별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등 사건처리절차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로부터 권고를 받은 기관은 그날부터 90일 안에 권고 사항의 이행계획을 인권위에 통지해야 한다. 만약 불수용할 경우 그 이유를 알려야 한다. 그러나 인권위 권고를 받은 기관이 이에 따르지 않더라도 인권위가 '권고 불수용 이유'를 공표만 할 수 있을 뿐, 제재나 불이익은 받지 않는다.
한편 피해자인 박 전 시장 비서 A씨 측은 인권위 조사 결과와 관련 "이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질 시간이 됐다"며 "인권위가 보통의 성희롱 사건보다 더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한 결과로도 박 시장의 A씨에 대한 인권침해를 사실로 인정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성희롱 사실이 인정된 만큼 고소 사실과 피해자의 지원요청 사실 누설과 관련된 이들은 직을 내려놓고 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더불어민주당을 향해선 "가해자가 속해있던 정당으로서 피해자에게 공식 사과하고 사안을 축소, 은폐하려 했던 모든 행위자를 엄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