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에 위치한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사무실 현판. 이은지 기자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등 진상규명이 완수되지 못한 '과거사'들을 다루는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사건이 출범 약 50일 만에 1300건을 넘어선 것으로 확인됐다. 아직 위원회 구성이 마무리되지 않은 진실화해위는 "2월 안에는 반드시 위원 구성을 마치고 정상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10일, 10년 만에 재출범한 진실화해위는 27일 '출범 50일'을 맞아 기자간담회를 진행했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전날 기준 위원회 측에 접수된 신청서는 모두 1347건(2178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지난 2006~2010년 활동했던 1기 당시 같은 기간 접수량과 비교했을 때 '130%' 정도 수준이다.
이 중 76% 이상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한국전쟁 등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으로 총 1030건(1362명)이 신청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인권침해·조작의혹사건 125건(618명) △적대세력 관련사건 111건(114명) △기타 54건(56명) △해외동포사 11건(11명) △항일독립운동 7건(8명) 등 순이다.
정근식 위원장은 "근본적으로 지난 1950년부터 이뤄진 3년 간의 한국전쟁 피해가 압도적으로 컸잖나. 관련 피해들에 대해 70년간 충분히 진실규명이 되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현상일 것"이라며 "민간인이 적게는 30만 명, 많게는 100만 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정확히 몇 명이 희생됐는지 지금까지도 잘 모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1기 때는 (한국전쟁 관련 사건이) 약 8천~1만 건 정도였다. 당시엔 '너무 오래된 일이고, 조사 신청을 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회의적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며 "그런데 저희가 진실규명한 결과로 여러 가지 배·보상에서 승소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한국전쟁의 상처를 제도적으로 치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들이 커졌다. 벌써 70년이 지나 많은 관계자들이 돌아가신 부분은 걱정되지만, 2기 때 (신청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출신의 정 위원장은 "대학에서 연구할 때 늘 아쉽게 생각했던 게 '이제 한국전쟁 전체를 종합적으로 조사해 정리할 때가 됐다'는 것'이라며 "가급적 민간인 희생사건과 적대세력 사건을 포함해 3년간의 전쟁 상황을 우리 국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종합보고서를 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러려면 적어도 모든 시·군·구의 조사가 불가피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난 1기 활동에서 미흡했던 점으로 '유해 발굴'을 꼽은 만큼, 종합적 발굴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겠다는 계획도 언급했다.
정 위원장은 "과거사에서 유해가 갖는 의미는 상당히 특별하고 중요하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뿐 아니라 1960~1980년대까지 각종 인권침해 사건에서 발생한 유해들도 있고, 대표적 예가 장준환 선생의 유골"이라며 "엊그저께 이춘재 연쇄살인에서 피해를 입은 초등학생의 아버님이 오셨는데 그분도 당신 딸의 유해를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지난달 10일 출범한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정근식 위원장이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이어 "유해는 과거 공권력 오남용의 중요한 증거로서 의미가 있고, 유해·기록·증언 등은 진실규명을 위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며 "국민들이 허락한다면 더 많은 예산을 갖고 종합적인 유해 발굴과 함께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할까 한다"고 부연했다.
진실화해위는 전국적으로 볼 때 전남지역이 211건으로 가장 신청이 많았고, 경남(140건), 전북(132건)이 뒤를 이었다고 밝혔다. 전국 266개 기초자치단체 중 모두 137개 시·군·구로부터 조사신청이 들어온 상태다.
정 위원장은 "시군구 수준에서 신청이 아직 없는 곳은 홍보가 충분하지 않다 판단해 다음 달부터 지자체 신청을 독려하기 위한 방문을 할까 생각 중"이라며 "특히 강원도 지역이 지금 굉장히 (신청이) 저조해 2월 초 강원도지사를 뵙고, 강원도 지역의 특성을 감안하며 신청을 독려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국민의힘이 위원으로 추천한 정진경 변호사가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재직시절 성추행 혐의로 정직 처분을 받았던 사실이 드러나 자진사퇴한 점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정 위원장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유감스럽지만 국회의 몫이고, 대통령 임명 전이었기 때문에 제가 왈가왈부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국회에서 좀 더 신중히 위원들을 선정하고 있다 생각하고, 더 위원회의 목적과 취지에 맞는 분이 오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 조사관을 충원해 조사 개시에 나서겠다는 의지도 나타냈다.
정 위원장은 "1300건 이상의 진실규명 신청을 90일 이내, 길게 잡으면 120일 내 조사개시를 결정해야 하는데 조사관 충원이 늦어지면 국민과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다"며 "객관적 절차를 통해 공정하고 투명하게 인재를 충원할 계획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약 두 달 정도 걸린다. 많은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이어 "국가 공권력의 오남용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을 위로하고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하려면 여러 가지 다양한 치유조치를 해야 한다. 많은 분들이 배·보상 등 물질적인 부분을 생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회적 인정'"이라며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아픔을 얼마나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는지, 개인들이 겪었던 심리적 고통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등이 종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