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일 '북한 원전 건설 문건'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연합뉴스
최근 논란이 된 북한에 대한 원자력발전소 제공설은 정부의 적극적인 해명으로 싱거운 해프닝에 그칠 공산이 커졌다.
의혹을 가장 깔끔히 정리한 사람은 정의용 외교부 장관 후보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지난 2일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자 비상식적 논리 비약"이라고 일축했다.
원전 제공을 검토한 사실이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는 게 요지다. 북한 비핵화와 대북제재 해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 등 최소 5개 조건이 충족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특히 북한에 전달한 휴대용저장장치(USB)는 미국에도 똑같이 제공됐다고 했다. 사실상 미국을 보증인 삼아 추가 의혹 제기의 싹을 잘라낸 셈이다.
◇"어불성설" 정부 강력 반박…'핵무장' 北으로서도 미흡한 보상조치이쯤 되면 원전 논란의 또 다른 당사자인 북한의 입장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의혹을 제기하는 쪽에선 또 다른 의혹감이다.
북한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거의 확실하다. 북한 입장에서 원전은 결코 비핵화의 합당한 보상조치가 될 수 없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정의용 후보자의 말대로 비핵화, 제재 해제, NPT 복귀 등 5개 조건 충족도 험난한 길이지만, 북한이 원전 하나 얻으려 그리 할 리도 만무하다.
북한은 더 이상 과거의 북한이 아니다. 핵 능력이 걸음마 수준이던 1990년대에는 경수로도 큰 보상이었지만 지금은 사실상의 핵 보유국이다.
북한은 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의 충격 속에 미국에 수교를 제안했다가 굴욕적인 퇴짜를 당한 뒤 절치부심했던 기억을 잊지 않는다. 간난신고 끝에 완성한 핵을 '겨우' 원전 때문에 내려놓을 리 없다.
◇북한은 '체제 안전' 요구…경수로에 만족했던 90년대 상황과 달라당연히 북한은 보다 큰 것을 원한다. 원전이 비핵화의 보상이 될 것이란 일부의 '착각'과 달리 북한은 일관되게 '체제 안전'을 요구해왔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뒤에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지고 자존심에 상처까지 입으면서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됐다.
지난해부터 북미대화 자체도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해야 시작할 수 있다며 문턱을 그나마 더 높여 놨다.
이런 마당에 비핵화와 원전을 교환하자고 한다면 북한은 아마 코웃음 정도를 넘어 크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지난달 14일 북한 평양에서 당 제 8차 대회 기념 열병식이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열병식에서는 '북극성-5ㅅ'으로 보이는 문구를 단 신형 추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등장했다. 연합뉴스
비핵화-원전 교환 방식은 기술적으로도 어려움이 크다.
일단, 어떤 이유로든 북한에 원전 제공을 결정했다면 그 시점은 비핵화 이후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이 만약 비핵화 이행을 중간에 멈춰버린다면 이미 투여된 막대한 원전 건설비용을 고스란히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선(先) 비핵화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전혀 없다. 결국 원전 건설에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중간 어느 단계에서 절충이 필요한데 북미 간 신뢰는 바닥 수준이다.
◇전문가 그룹은 '해프닝' 판정…'정치 이슈화' 불 지피기는 지속북미 비핵화 협상은 양측 이익의 균형이 맞을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한의 필사적인 '체제 안전' 요구 앞에 원전 제공은 기껏해야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제는 어느 모로 보나 대북 원전 제공설의 비현실성이 드러나는데도 정치 이슈화가 지속되는 현상이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보수·진보와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 실체 없는 해프닝으로 판단 내리고 있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도 "산업부가 북한 원전 건설을 검토한 사실 자체만 두고 본다면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이적행위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도한 분란은 외교적 자해…美 '강경파 득세' 부정적 신호 우려하지만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문제의 USB가 통일부 대북반출 승인을 받았는지 여부까지 추궁하며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어려운 민생을 외면한 처사라는 비판을 차지하고라도 국가 전체적으로는 외교적 자해 행위에 가깝다.
연합뉴스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중국이나 이란정책과 달리 아직 유동적인 상황에서 한국 내 갈등과 혼란은 미국에 부정적 신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정부의 대북 정책라인은 '클린턴 2기'(적극적 개입)냐 '오바마 2기'(전략적 인내)냐를 놓고 강온파 간 교통정리가 아직 되지 않은 상태로 알려졌다.
예컨대 한국계 정박 신임 미 국무부 동아태부차관보는 최근 남북화해를 '이루지 못한 짝사랑 같은 약속'에 빗대며 문재인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미 '대북전단규제법' 파동 등으로 한국 정부에 '반인권' '친북정권' 프레임이 씌워지는 판국에 원전 소동까지 더해질 경우 미국 내 강경파 입지는 더 강화된다.
그에 반해, 원전 제공설의 실체적 진실과 상관없이 국내 분란이 계속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한국의 협상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초당적 국익 외교가 아쉬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