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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낙인 속 고통…제주4·3 학살 고아의 70년 恨

제주

    사회적 낙인 속 고통…제주4·3 학살 고아의 70년 恨

    [제주4‧3, 짓밟힌 꽃망울⑤]
    폭도새끼 놀림에 '연좌제' 피해
    생계 어려움 속 머슴‧식모살이
    정신적 고통에 극단적 선택 시도도
    "학살 고아…4‧3역사 속 희생자"

    70여 년 전 제주 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희생자 10명 중 2명은 아이들이었다. 4‧3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동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2일은 다섯 번째 순서로 4‧3 학살 고아의 아픔을 보도한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②제주4‧3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③"마구 때리고 고문"…소녀에게 제주4·3은 '악몽'이었다
    ④제주4‧3 '고난'의 피난길…여린 아이들은 죽어나갔다
    ⑤사회적 낙인 속 고통…제주4·3 학살 고아의 70년 恨
    (계속)
    4·3으로 부모를 잃은 오순명 할아버지(78)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얘기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폭도새끼'

    4‧3 당시 부모를 잃은 5살 소년이 들어야 했던 말이다. 지난달 14일 서귀포시 하효동 자택에서 만난 오순명 할아버지(78)는 73년 한을 털어놨다.

    ◇고아로 교육대학 졸업해도…'연좌제'에 좌절

    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1948년 11월 초순 서귀포시 하효동 자택에서 영문도 모른 채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이후 11월 30일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됐다. 앞서 15일 어머니도 아버지 면회를 가던 길에 군인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어머니는 아버지 주려고 음식 싸서 가는데,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가다가 총으로 쏴 죽여불언게."

    보름 사이에 부모를 모두 잃은 5살 소년은 졸지에 고아가 됐다. 외동아들이었던 오 할아버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런 오 할아버지에게는 늘 '폭도새끼'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폭도새끼라고 집에 낙서를 하질 않나. 사춘기 때는 동네 아이랑 다퉜는데, 그 부모가 '폭도새끼 말이야. 부모 없이 사니깐 아이들이나 때린다'고 욕을 하는 거라. 부모 없는 서러움이 말도 못해."

    오순명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희생된 서귀포시 정방폭포. 고상현 기자

     

    오 할아버지는 성인이 돼서는 '연좌제'로 고통 받았다. 어렵게 교육대학을 졸업했지만, 4‧3 당시 부모가 희생됐다는 이유로 학교 발령이 안 났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연좌제로 발령을 안 시켜주는 거라. 그때 극단적 선택 시도도 여러 번 하고, 사회를 원망해나서."

    ◇생계 어려움…학업 포기한 채 머슴살이

    취재진이 최근 한 달간 만난 4‧3 생존자 대부분이 오 할아버지의 경우처럼 부모를 잃은 것도 모자라 사회적 낙인까지 찍혔다.

    12살의 나이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눈앞에서 어머니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던 정순희 할머니(86)는 "마을 사람덜이 폭도가족이랜. 길을 다니질 못해 나서"라고 말했다. 정 할머니는 그 낙인을 지우기 위해 군인과 결혼을 해야 했다.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고아가 되면서 생계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생존 피해자 대부분이 학업도 포기한 채 머슴살이, 식모살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16살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한 맺힌 삶을 살다 지난해 항현 86세로 작고한 故 박남진 할아버지. 아들 박용현(68)씨가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 고상현 기자

     

    평생 한 맺힌 삶을 살아오다 지난해 향년 86세로 작고한 故 박남진 할아버지는 16살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나서 중학교도 그만두고 머슴 일을 했다. 박 할아버지의 아들 박용현(68)씨는 "아버지께서 이 일 저 일 안 해보신 일이 없으셨대요.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도 어렵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신적인 고통도 상당했다.

    생후 17개월에 어머니와 함께 서귀포시 성산포 터진목에 끌려갔다가 홀로 살아남은 오인권 할아버지(75)는 "부모님의 부재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참 힘들었어. 물질적인 것보다도 심적인 고통이 심했어"라고 말했다.

    "학교 공부도 계속 하고 싶었는데 부모를 잃은 마당에 할 수도 없었어. 누가 혼내면 부모가 없어서 혼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사춘기 때는 수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어. 그래도 죽지 않으니깐 살아야 할 몸이라고 생각했지."

    ◇"4‧3 학살 고아…역사 속 희생자"

    총탄에 부모를 잃고 '학살 고아'가 됐던 아이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고된 삶을 살아가느라 꿈도 포기했고, '연좌제'로 죄인처럼 살았다. 4‧3은 이들의 미래마저 앗아갔다.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 고상현 기자

     

    제주4‧3연구소 허영선 소장은 "4‧3 당시 군‧경의 과도한 진압으로 부모를 잃으면서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이 너무 많다. 부모가 버린 것도 아닌데도 이 아이들은 그 역사 속에서 희생자가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생존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혹은 자기가 겪었던 열 살, 열두 살 때부터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전 인생을 지배해버린다. 그들의 남은 삶은 이 상흔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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