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의혹을 낳으며 국민적 관심이 쏟아졌던 '고(故) 손정민씨 사망사건'이 종착역에 다다랐다. 그간 수사력을 집중해 온 경찰은 별다른 타살 혐의점이 보이지 않는다고 보고 조만간 수사를 마무리지을 것으로 예상된다. 유가족의 슬픔에 공감한 시민들의 연대와 지지가 이어졌던 이번 사건은, 한편으로는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빗발치며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경찰은 여론의 공고한 '불신'에 단단히 홍역을 치렀다. CBS노컷뉴스는 이번 사건이 보여준 사회적 파장을 되짚고, 남겨진 과제들을 집중 분석해봤다.[편집자 주]
서울 반포한강공원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 숨진 손정민씨를 추모하는 글과 물품들이 놓여 있다. 이한형 기자
"누구나 각자의 의견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각자만의 사실을 가질 권리는 없다."(You are entitled to your opinion. But you are not entitled to your own facts.) 미국의 정치인 다니엘 패트릭 모이니핸(1927~2003)이 남긴 문장은 '탈진실(post-truth)' 시대에 대한 예언처럼 보인다. 뜨거운 사회적 이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를 타고 가짜뉴스를 숙주로 한 음모론과 진영 논리 속에 잠식되고 있다.
여기 10여년의 격차를 두고 한국사회에 데칼코마니처럼 출현한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2010년 그룹 에픽하이의 멤버 '타블로'(본명 이선웅)의 학력위조 의혹을 제기한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타진요), 다른 하나는 올해 한강공원에서 실종된 후 숨진 채 발견된 고(故) 손정민씨 사건 수사과정에서 결성된 '반포한강사건 진실을 찾는 사람들'(반진사)이다.
◇"정민씨 친구 왜 피의자 입건 안하나"…경찰 수사 노골적 '불신'
'반포한강사건 진실을 찾는 사람들'(반진사) 네이버 카페 대문 캡처.
반진사는 최근 손정민씨 사건과 관련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민간단체다. 이들은 손씨가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지난 4월 30일 이후 약 2주 만인 지난달 16일 네이버 카페를 개설했다. 지난 1일에는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비영리단체 등록도 마쳤다.
유튜브 채널 '종이의 TV' 진행자인 박재용씨 등이 주축이 된 운영진은 홈페이지 대문에 "반진사는 팩트에 근거해 진실을 찾는 카페다. 자극적, 음모론적인 이야기를 배제한다"며 "드러난 팩트에 대해 이상한 점, 잘못된 점에 대해서 끝까지 추궁하여 진실을 찾는 카페"라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주목할 부분은 "함께 싸워요"라고 덧붙여진 청유문이다. 생략된 목적어는 이들의 활동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반진사는 손씨 사건이 발생한 지 딱 한 달 만인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경찰의 수사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당연히 해야 할 조치도 하지 않아 대다수 국민들은 부실수사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손씨와 한강공원에서 함께 술을 마신 친구 A씨를 '피의자'로 입건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들은 △손씨를 찾기 위해 새벽시간 한강공원으로 돌아온 A씨와 가족이 곧바로 정민씨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은 점 △당일 A씨가 신은 신발을 A씨 측이 '더럽다'는 이유로 버린 점 등을 두고 "합리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A씨가 손씨의 사망에 일말의 원인을 제공했으리라는 이들의 추측은 "범죄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경찰의 공개 발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경찰청은 지난달 27일 A4 용지 23쪽에 달하는 '한강 대학생 사망사건 관련 그간 수사진행사항'을 언론브리핑 형식으로 발표했다. 경찰은 수사를 둘러싼 갖가지 의혹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특히 A씨 측이 경찰 수사에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현재까지 A씨 및 그 가족은 참고인 조사에 전부 응했다. 가택·차량 수색, 휴대전화 포렌식 등에 전부 동의했다"며 "(A씨 아이패드의) 포렌식 결과 일체 삭제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반진사는 "(경찰이) 만취로 특정한 고인이 새벽에 경사 40도의 비탈을 혼자 내려가 일반인도 균형을 잡고 걷기 힘든 돌밭을 일체의 외상없이 걸어서 지나치기 어렵다는 사실은 현장에 한 번이라고 가봤다면 너무나 쉽게 판단할 수 있다"며 "이럴 경우 그 다음 외상의 발생 요인으로서 고인과 가장 긴 시간 동안 함께 있었던 동석자와의 연관성 혹은 충돌 가능성을 조사하는 게 논리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에 대한 수사기록은 그 어디에도 전혀 언급된 바 없다"며 "A씨에 대한 수사당국의 납득할 수 없는 무한한 배려 아래 아직까지 참고인 신분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것은 경찰의 품위를 손상케 할 만한 심각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A씨 측이 입장문에서 해명한 과음으로 인한 '블랙아웃'을 두고도 "신빙성을 의심케 할 만큼 선택적이며 중요진술이 수차례 번복됐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A씨의 범죄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는 것은 비단 경찰만이 아니다. 서울대 법의학교실 유성호 교수는 정민씨 사건을 다룬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서 "블랙아웃이란 건 결국은 남들이 보기에도 괜찮고 자신도 (당시에는) 괜찮다"며 "해마의 손상 때문에 나중에 기억이 안 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북대 법의학교실 이호 교수도 "(블랙아웃 상태에서도) 일상적 활동이 가능하다"며 "(비유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데 테이프가 있다면 테이프에 기록이 안 남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진사에게서 '제2의 타진요'와 같은 기시감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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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여개 증거에도 "못 믿어"…'진실'의 수호자 자처하는 이들타진요는 지난 2010년 5월경 타블로가 미국의 명문대인 스탠포드대를 실제 졸업하지 않았음에도 '대학원 영문학 석사'라는 학력을 허위로 꾸며 행사한다는 의혹을 개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왓비컴즈'(Whatbecomes)라는 아이디로 활동한 미국 시민권자 김모씨를 포함한 카페 회원들은 "타블로는 미국에 간 적이 없고 대학에도 간 적이 없다", "타블로가 제출한 성적증명서·졸업사진 등은 모두 위조됐거나 합성된 것이다", "타블로의 가족은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서 10년간 학력·경력을 속여 온 사기꾼 집단이다", "타블로는 언론사 기자들을 돈으로 매수해 기사를 쓰게 했다" 등의 주장을 폈다.
이에 타블로는 타진요 회원 22명을 검찰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이 사건은 현재 손씨의 사건을 수사 중인 서초서에 배당됐다. 타진요 회원들도 타블로의 학력 및 '이중국적' 의혹 진상을 밝혀달라고 수사를 의뢰하면서 진실 공방은 법적 분쟁으로 번졌다.
타블로는 졸업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학위증명서는 물론 성적증명서와 교수의 확인서, 미국 공인 학력인증기관인 NSC의 인증서, 재학 당시 기숙사 사진, 스탠포드 입학 전 국제학교 재학 증명서 등 170여개의 증거를 제시했다. 법원이 ETS(미국 교육평가원)에 공문으로 요청해 회신 받은 SAT 성적결과와 스탠포드대 측이 직접 경찰과 법원에 송부한 공문도 포함됐다. 대검찰청 과학수사담당관은 해당 문서들의 문양 및 형식이 모두 일치해 위조 또는 변조서류가 아니라는 감정결과를 내놨다.
일부 회원들은 타블로의 석사학위 논문이 스탠포드대 논문목록에 없고, 타블로가 밝힌 재학기간이 NSC 측의 자료와 다르다는 점 등을 지적했지만 이 역시 사실무근으로 나타났다. 타블로가 밟은 석사과정은 논문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재학기간의 기록 차이는 기관의 전산오류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타진요 회원 9명을 재판에 넘겼고, 1심 재판부는 지난 2012년 7월 김씨 등 4명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또 다른 회원 5명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 중 "형이 너무 무겁다"며 유일하게 상고심에 이른 김씨는 2013년 1월 유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타진요를 들어 "타블로의 학력에 대해 단순히 의혹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언론에 표현되어 전달되는 과정이나 기억의 불완전성 또는 예능방송의 특성상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왜곡이나 과장, 허위만을 들어 비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특히 "내가 나의 학력이나 경력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일견 매우 쉬운 것으로 생각되나, 누군가가 내가 내어놓는 모든 증거들을 일방적으로 모두 믿을 수 없다고 한다면, 결국 어떤 증거를 보여도 믿게 할 수 없고 피고인 같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조차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객관적 증거로 사실관계를 설득해내는 일은 국가기관에게조차 난망한 일임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타진요 회원들은 수사기관이 확보한 자료들조차도 "해킹에 의한 것", "학력브로커의 조작" 등 '믿을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진실을 추구한다 하지만, 원하는 그 알맹이의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이는 정민씨의 친구 A씨가 '피의자'라는 결론을 상정하고 있는 반진사와도 상통한다. 두 단체가 '진실'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2'(타진요) 네이버 카페에 올 1월 올라온 게시물. 이 카페에는 아직도 3만 5100여명의 회원이 남아있다. 카페 홈페이지 캡처
타진요는 명의 도용문제로 한차례 폐쇄됐지만, 현재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2'라는 제목으로 존속 중이다. 올 초 에픽하이의 컴백과 맞물려 "이명박 시절에는 대통령이 커버 쳐줘(은폐해줘)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 지금 시대면 그래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등의 게시물이 올라오기도 한 '타진요2'의 회원은 3만 5100여명 수준이다. 반진사는 지난 7일 기준 3만 4900여명의 회원이 가입해 있다.
◇'권력기관은 정보 조작'…"정부 불신 토대로 한 강력한 확증편향"전문가들은 두 집단에게서 공통적으로 전형적인 '확증 편향'이 관찰된다고 분석했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최진봉 교수는 "타진요 당시에는 유튜브가 없었지만 (본질은) 똑같다. 현상적으로 보면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온라인에서) 떠돌고 있는 정보들에 신뢰성을 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정보를 신뢰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본인들의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국대 심리학과 임명호 교수는 자신들의 희망이 현실과 배치될 때 현실을 거부하는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임 교수는 "본인이 믿고 있는 신념이나 믿음이 그 어떤 사실보다 우선하는 것"이라며 "내 믿음이 깨져버리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들, 믿어온 것들이 무너지는 게 너무 싫은 거다. 자기자신을 부정하는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맹목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이라 번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어떻게 보면 사이비 종교와도 비슷한 것"이라며 "반진사 사태는 타진요 이상으로 더 크게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적 불황과 장기간 지속된 코로나19 사태 등 전반적으로 불안정한 사회적 환경도 반진사의 발생과 결속에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임 교수는 "경제·사회적 어려움이 계속 있어왔고 주거·직장문제가 가중된 데다 코로나19가 2년 가까이 장기화되면서 정부나 사회 공권력에 대한 불신이 누적돼왔다"며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가 '경찰이 사건 수사에 공정하지 않다'고 심리적으로 투사된 부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의 시민들은 돈이나 이익보다 '정의감', '공정성'에 대해 굉장히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반진사 역시 나쁜 의도가 아니라 이 사회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주도적으로 참여한다는 순수한 마음은 있다"며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 생각하다 보니 '우리는 이걸 바로잡기 위해 분노한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입맛에 맞는 뉴스나 콘텐츠만을 '팔로잉'하게 설계된 유튜브와 1인 방송 같은 미디어 환경도 이같은 현상을 가속화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시사주간지 '시사IN'의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미디어 이용자들이 현재 가장 신뢰하는 매체는 유튜브(13%)다.
최 교수는 "수사기관의 조사내용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이 유발되는 이유 중 하나는 유튜브나 개인방송들이 만들어내는 콘텐츠 때문"이라며 "1차적으로 사람들에게 들어온 정보는 절대적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것이 '프라임 이펙트'(prime effect)다. 처음에 어떤 정보를 입수하느냐에 따라 이 정보가 바뀌려면 그보다 훨씬 더 강한 정보가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보만을 보다 보니 일반 언론이나 당사자의 해명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권력기관에 의해 사건이 조작되고 있다는 생각과 관념 속에서 접근하다 보니 경찰이 어떤 발표를 하든 믿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 교수 역시 "정보를 알기 훨씬 쉬워졌고 SNS가 발달하다 보니 자신과 같은 의견을 찾아가거나 동조하기도 훨씬 쉬워졌다. 어마어마하게 달리는 댓글을 통해 생각에 대한 동조를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게 됐다"며 "(내용이) 자극적이고, 부정적이고, 파국적이어야 더 뉴스감이 되고 돈을 벌 수 있다 보니 유튜버들은 너무 상업적으로 돼버렸다"고 지적했다.
학벌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상징성이 반진사의 세 확산에 한몫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임 교수는 "일반적인 우리의 심리는 대립구조를 사용한다. 진실은 '죄를 지은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정민씨 사건은) 피해자가 있는 반면 가해자는 없다는 것"이라며 "혼자 열심히 해서 가장 잘될 수 있는 위치 중 하나가 의대생인데 선망의 대상이 일상적인 공간에서 피해를 당했다는 것도 더 많은 공감과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A씨 측 법률대리인인 법무법인 원앤파트너스 정병원 변호사는 지난 7일 서초서에 반진사의 운영진인 유튜브 채널 '종이의 TV'를 정보통신망법 위반·모욕 등의 혐의로 고소한다고 밝혔다. A씨의 신상정보를 공개하고 A씨를 사실상 손씨 사망사건의 피의자로 특정하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