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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청년 5천명 떼죽음 당한 그 사건[한국 역사를 바꾼 오늘]

미국/중남미

    한국 청년 5천명 떼죽음 당한 그 사건[한국 역사를 바꾼 오늘]

    편집자 주

    1965년 오늘(8월 13일)은 국회가 월남전 전투부대 파견을 처음 승인한 날이다. 월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대한민국 청년은 5천 명. 미국을 제외한 참전국들 전체 전사자의 6배에 이르는 숫자다. 한국이 남의 나라 전쟁서 그렇게 총알받이 노릇을 했던 이유는 미국 정부와 박정희 정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미국 정부의 문서를 공개한다.

    월남전 파병, 기억해야 할 이야기
    존슨, 朴에 전투부대 노골적 요구
    파병장병들에게 비밀리 '일수' 지급
    용병 논란 피하려 출처불명 예산사용
    미국 장병 전투비용에 비하면 '땅콩값'
    파병 먼저 제안한 측은 박정희 정권
    "박정희, 월남파병을 알라딘 램프로 봐"

    월남전에 파병된 청룡부대 3여단 2대대 6중대 부원들이 베트남 투이호아(Tuy Hoa) 지역에서 참호를 구축 중이다. 출처: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월남전에 파병된 청룡부대 3여단 2대대 6중대 부원들이 베트남 투이호아(Tuy Hoa) 지역에서 참호를 구축 중이다. 출처: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1965년 5월 17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기밀 해제된 당시 회담 대화록엔 존슨-박정희 대통령 간 대화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미국 기밀문서 다운로드]
    ​​​

    CBS노컷뉴스가 미국 뉴저지 버건 커뮤니티 칼리지 이길주 교수(역사학)를 통해 입수한 대화록에는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해 줄 것을 거듭 요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 대화록 2페이지의 중요 부분(왼쪽 상자)과 그 번역본(오른쪽). 왼쪽 원문에는 중간에 삭제된 흔적도 보인다. 출처: 린든 존슨(LBJ) 도서관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 대화록 2페이지의 중요 부분(왼쪽 상자)과 그 번역본(오른쪽). 왼쪽 원문에는 중간에 삭제된 흔적도 보인다. 출처: 린든 존슨(LBJ) 도서관그런데 그다음 존슨 대통령의 발언 일부가 지워져 있다.(위 사진 왼쪽 중간 부분)
     
    지우기 전 원본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을까?
     
    추가로 입수한 원본에는 '의회에서 대외 원조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베트남에 비전투부대를 파병해서 그런 우려를 불식했다'는 취지의 존슨 대통령의 언급이 들어있다.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 대화록 초안. 빨간 상자가 삭제되기 전 부분이다. 존슨 대통령이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내가 의회에서 원조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아주 도움이 됐다. 원조 프로그램 비판자들은 항상 원조가 좋은 결실을 맺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와 베트남에서 한국의 활동은 원조 프로그램이 강력한 동맹 건설에 아주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보여준다"고 재차 강조했다고 돼 있다. 출처: LBJ 도서관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 대화록 초안. 빨간 상자가 삭제되기 전 부분이다. 존슨 대통령이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내가 의회에서 원조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아주 도움이 됐다. 원조 프로그램 비판자들은 항상 원조가 좋은 결실을 맺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와 베트남에서 한국의 활동은 원조 프로그램이 강력한 동맹 건설에 아주 잘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보여준다"고 재차 강조했다고 돼 있다. 출처: LBJ 도서관3페이지로 돼있는 회담록 말미엔 존슨 대통령이 결론 삼아 다시 한번 추가 파병을 압박한 것으로 돼 있다.
    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 대화록 마지막 페이지. 존슨 대통령이 결론 삼아 말한 붉은 상자를 번역하면 이렇다. "미국은 베트남과 한국에서의 약속이 똑같다고 느낀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베트남전에) 합류하도록 압박하는데 한국이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국은 말레이시아에 매우 신경 쓰고 있다. 한국군 1개 사단 증원을 약속해주기를 바란다." 출처: LBJ 도서관1965년 5월 17일 한미정상회담 대화록 마지막 페이지. 존슨 대통령이 결론 삼아 말한 붉은 상자를 번역하면 이렇다. "미국은 베트남과 한국에서의 약속이 똑같다고 느낀다. 호주와 뉴질랜드가 (베트남전에) 합류하도록 압박하는데 한국이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국은 말레이시아에 매우 신경 쓰고 있다. 한국군 1개 사단 증원을 약속해주기를 바란다." 출처: LBJ 도서관그때까지 한국은 이미 두 차례 '비전투' 병력 2천 명을 파병했었다. 이날 존슨이 요구한 1개 사단이란 '전투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정상회담 이후 박정희는 전투사단 파병을 결정하고 65년 8월 13일 논란 끝에 전투부대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국회 통과 과정에서 파병 대가로 군수품과 장병들 수당까지 미국에 지원받기로 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6월 23일 윈스럽 브라운 주한미국 대사가 올린 전문에 따르면 브라운 대사는 당시 해당 내용을 발설한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수당 지급은 비밀이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앞으로도 언급하지 말고 △어쩔 수 없는 경우는 가급적 별일 아닌 채 하라고 신신당부했다.(아래사진 붉은상자)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군 파병 장병 수당을 1일 단위(per diem)으로 지급했으며, 통상적인 대외 지원금 항목이 아닌 출처 불명의 돈으로 지불했다. 국무부는 이에 대해 "용병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아래사진 파란상자)
    1965년 6월 23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전보. 김성은 국방장관이 월남파병 장병들에게 미국이 수당을 지급키로 발설했다는 보고 내용(붉은상자)이 들어있다. 파란상자는 파병 장병들 수당을 1일 단위로 지급했으며 용병논란을 피하기 위해 대외 지원금이 아닌 별도의 예산으로 지급했다는 국무부의 별도 주석(설명)이다. 출처=국무부1965년 6월 23일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본국에 보낸 전보. 김성은 국방장관이 월남파병 장병들에게 미국이 수당을 지급키로 발설했다는 보고 내용(붉은상자)이 들어있다. 파란상자는 파병 장병들 수당을 1일 단위로 지급했으며 용병논란을 피하기 위해 대외 지원금이 아닌 별도의 예산으로 지급했다는 국무부의 별도 주석(설명)이다. 출처=국무부전투부대로는 맹호부대가 처음 파병된 이후 미국의 전투병 파병 요구는 이제 노골적으로 바뀐다. 이듬해 1월 미국은 두 배 증파를 한국정부에 요청할 것을 주한미국대사관에 지시한다.
     
    하지만 대사관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최대한 관대하자고 본국을 설득한다.
     
    66년 1월 21일 대사관이 국무부에 올린 전문에는 △한국 내 전투력의 저하, △박 대통령의 정치적 난관 봉착, △상당한 예산의 수반 등의 문제가 나열돼 있다.
     
    물론 '상당한 예산 수반' 항목에서는 미국군 투입에 비하면 비용이 절감된다는 이점도 함께 적시돼 있다.(아래 붉은상자)
     
    특히 한국군이 파병 증원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경우 1일 수당 25% 인상안이 제시돼 있다.(아래 파란상자)
    1966년 1월 21일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 주요 부분(위 상자) 번역 참고(아래). 출처: 국무부1966년 1월 21일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 주요 부분(위 상자) 번역 참고(아래). 출처: 국무부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미국 본국은 추가 파병을 강하게 압박한다.
     
    그러자 브라운 대사의 입장도 완곡한 반대에서 단호한 반대로 바뀐다.
     
    66년 3월 18일 전문을 보자.
    1966년 주한미국대사 브라운이 본국에 올린 전문. "우리는 이미 한국인들을 강하게, 그리고 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압박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이 남베트남에 병력을 공급하는 무궁무진한 원천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 국민들의 감정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고,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전쟁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상당한 국가적 불안감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 감정과 우려가 진정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목숨과 안보와 관련돼 두 차례 중대하고도 긴밀한 결정을 내린 후 숨 돌릴 시간을 주어야 한다. 병력 지원 요청 시기와 속도를 직접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붉은상자) 출처: 국무부1966년 주한미국대사 브라운이 본국에 올린 전문. "우리는 이미 한국인들을 강하게, 그리고 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압박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한국이 남베트남에 병력을 공급하는 무궁무진한 원천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 국민들의 감정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고, 한국이 어느 정도까지 (전쟁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상당한 국가적 불안감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 감정과 우려가 진정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한국인들이 목숨과 안보와 관련돼 두 차례 중대하고도 긴밀한 결정을 내린 후 숨 돌릴 시간을 주어야 한다. 병력 지원 요청 시기와 속도를 직접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붉은상자) 출처: 국무부그러나 추가 파병은 끝내 관철됐고, 65~66년 2년간 전투병력 4만 5천 명이 파병되는 등 베트남전 종전까지 우리군 30만 명이 베트남 전장에 투입됐다.
     
    파병과정을 보면 미국의 강권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이 먼저 파병을 제안한 것 또한 사실이다.
     
    64년 3월 7일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올린 비밀 전문을 보자.
    1964년 3월 7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비밀 전문. 출처: LBJ 도서관1964년 3월 7일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비밀 전문. 출처: LBJ 도서관박정희 정권이 파병을 먼저 제안한 이유와 관련해 역사학계는 △미국에 대한 충성을 통해 쿠데타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원조 축소 움직임을 막기 위해 △파병 대가로 경제적 보상을 받기 위해(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자금마련을 위해) △주한미군의 베트남전 투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등 다양한 분석을 제기했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에는 한국군의 파병을 원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50년대 1차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을 파병하겠다고 했을 때와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명분과 실익 모두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65년 3월 '통킹만사건'(베트남 앞바다에서 북베트남이 미군함을 공격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 뒤 한국군 전투병력 파병 요구로 완전히 선회한다.
     
    그리고 한국 전투부대의 활약상을 본 뒤부터는 곶감을 꺼내 먹듯 총 4차례 추가 파병을 받아냈다.
     
    미국이 한국의 전투부대를 원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버건 커뮤니티칼리지 이길주 교수는 CBS노컷뉴스와 인터뷰에서 한국 전투병력 파병은 미국에게는 1석 4조의 효과가 있는 카드였다고 설명했다.
     
    우선 미국으로선 '땅콩값'으로 한국군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당시 존슨 대통령 특보인 잭 발렌티는 한국군에 지급하는 물자와 자금은 같은 숫자의 미군에게 투입하는 양에 비하면 '땅콩'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고 말했다.
     
    브라운 대사도 당시 한국군이 참전하면 미국이 '피'와 '돈'을 상당히 아낄 수 있어 실질적인 기여가 된다는 보고서를 올리기도 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 미군 장병들이 적십자 측의 봉사를 받고 있다. 출처: NARA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당한 미군 장병들이 적십자 측의 봉사를 받고 있다. 출처: NARA다음으로 한국군의 경쟁력이었다. 미국은 한국 군대가 6.25라는 실전 경험과 상시적인 훈련으로 늘 준비돼 있는 군대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반공의식도 투철하다고 간주했다. 베트콩과 싸울 적임자로 본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의 초기 자발적 참전 의지가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길주 교수는 "당시 존슨 대통령은 아시아 청년이 할 일을 미국 청년이 하도록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공산권 확장이 빨랐다. 도미노를 막기 위해 미국군이 전쟁에 개입해야 할 상황에서 한국군이 참전을 자청해주니 걸림돌이 없었던 셈"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미국이 국제사회에 요구해 수혈받은 해외 병력은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 등이었다.
     
    한국군 참전인원은 총 32만 명. 미군 참전 인원의 12%에 이르는 숫자다.
     
    사망자는 미군 5만 8281명, 한국군 5099명, 나머지 파병국가들 943명이었다. 우리 군의 사상자가 미군을 제외한 나머지 연합군 전체 사망자의 6배에 이른다.
     
    물론 우리로서는 월남전에 참전해 전쟁의 특수를 누린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를 미국도 인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파월장병을 한국의 꿈을 이루는 '요술 방망이'로 간주하고 있다며 심리를 꿰뚫었다.
    1967년 11월 25일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올린 전문. "한국 정부는 특별한 격려를 받지 못할 때 자신의 요구나 실망감을 표현하는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요컨대, 그들은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5만 한국군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알라딘의 램프'로 보고 있다." 출처: 국무부1967년 11월 25일 주한미국대사관이 본국에 올린 전문. "한국 정부는 특별한 격려를 받지 못할 때 자신의 요구나 실망감을 표현하는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요컨대, 그들은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5만 한국군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알라딘의 램프'로 보고 있다." 출처: 국무부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바로 이 같은 노림수를 역으로 이용해 자국서도 반대가 컸던 명분 없는 전쟁에 한국 청년 30만 명을 '임대하듯' 활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베트남전쟁이 한미동맹의 그늘진 역사로 기록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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