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연합뉴스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퇴임한다. 16년간 독일을 이끈 메르켈은 최초의 동독 출신, 최초의 여성, 최연소 그리고 자발적으로 퇴임하는 최초의 총리 등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간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메르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래도 여전히 메르켈의 인기는 높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5%가 메르켈의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메르켈에게는 여러 차례의 위기가 있었다. 2008년 국제금융위기는 전 세계를 위험에 빠뜨렸고, 유럽과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취약한 경제기반을 갖고 있던 그리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휘청거렸고, 경제공동체 EU가 붕괴될 위기에 놓였다.
경제강국 독일과 메르켈 총리의 결단과 재정지원으로 EU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만일 EU가 해체됐다면, 그 여파는 세계 경제를 훨씬 큰 위기로 몰아넣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난 6월 G7 정상회의에서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 다섯번째). 청와대 제공시리아 내전에 따른 난민 수용 문제도 메르켈을 곤경에 몰아넣었다. 메르켈른(merkeln)이란 말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메르켈하다' '메르켈스럽다'는 뜻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하다.
결정을 내릴 때 지나치게 신중하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출하지 않는 메르켈의 우유부단한 성향을 지칭하는 단어다. 하지만 메르켈은 국내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만 명에 이르는 국제난민을 과감히 수용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연합뉴스'메르켈스럽지' 않은 결단이었다. 난민 수용에 따른 재정위기를 걱정했지만, 6년이 지난 현재 독일이 난민으로 인한 재정문제를 겪고 있다는 지표는 없다. 코로나19에 따른 지나친 규제조치로 시민들 특히 젊은 층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코로나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 국가다.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외교무대에서도 메르켈은 돋보이는 외교관이었다. 메르켈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세계 강대국들이 모두 민족주의, 극우적 성향이 강화되고 있는 국제무대에서 국제적 다원주의,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중심을 잡아준 중요한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메르켈이 4연임을 고심하고 있을 때 퇴임하는 오바마 대통령이 트럼프의 취임을 앞두고 총리직을 유지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란과의 핵협상 파기, 파리기후협약 탈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은 트럼프와 비교하면 메르켈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난다.
동서독 2차 정상회담 당시 시위대를 막아선 경찰. 연합뉴스무엇보다 메르켈은 우리에게 가장 부러운 정치인이다. 분단됐던 독일에서 그것도 공산치하의 동독 출신 여성이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된 사건은 우리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과 같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메르켈의 가장 큰 장점인 안정성과 지속성을 우리 정치현실에서는 대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정치제도와 독일과는 단순 비교가 어렵다. 하지만 'All or Nothing'의 극단적인 이분법만 존재하는 우리 정치현실과 비교한다면, 메르켈 같은 정치인은 부러운 존재다.
메르켈의 재임기간 동안 우리는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황교안 권한대행, 그리고 문재인 등 모두 5명의 대통령을 겪었다. 이들 5명 가운데 현직인 문재인 대통령을 제외하면 전직 대통령들의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게 된다.
지난 6월 한-독일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 청와대 제공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고발 사주 의혹 사건이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가장 큰 이슈로 등장했다. 이 문제에 키를 쥐고 있는 김웅 의원은 이리저리 말을 바꾸며 혼란만 더 키우고 있다. 젊은 정치인들에게 기대했던 신선하고 개혁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구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실망스럽다.
최연소, 최초의 여성, 최초의 동독 출신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16년 동안 독일을 잘 이끈 메르켈 같은 정치인이 탄생할 수 있는 정치토양이 우리에게도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