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씨가 23일 역사적, 사법적 심판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향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31년 1월 23일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씨는 1955년 육사 11기로 졸업했다. 육사 생도 시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던 전씨는 졸업 후에육사 동기인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군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만들었다.
전두환. 박종민 기자"1961년 5월 혁명의 횃불을 들어 올렸던 그 시절 박정희 장군의 형형한 눈빛과 기백 넘치던 열정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2017.04. '전두환 회고록')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시민들의 저항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전씨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요구 시위에 대해 공수부대까지 투입해 자국민을 학살했다. 전씨는 발포명령자로 진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불의의 10·26사태는 결과적으로 한 시대를 마무리짓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구시대의 그릇된 기풍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깨끗하고 서로 믿는 정의로운 새 사회와 부강한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확신합니다.(1980년 9월 1일 제11대 대통령 취임사)학살과 만행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씨는 1980년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으로 제 11대 대통령이 됐다. 이어 10월 27일 7년 단임제 대통령제 헌법을 공포한 뒤 간접선거로 12대 대통령까지 취임했다.
전씨 재임기간 내내 자유와 민주는 철저히 유린당했다. 언론탄압과 노조 해산은 물론이고 학림부림 사건, 삼청교육대 설치 등이 이 때 일어난 일이다.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우민화 정책 3S(스포츠·스크린·섹스)가 활용되기도 했다.
1980년 9월 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모습. 연합뉴스하지만 군부독재에 저항하며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의 요구는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전씨는 야당 후보의 출마를 방해하는 등 독재체제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기폭제가 된 1987년 6월 항쟁까지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요구를 수용했다.
퇴임 뒤 전씨는 재임 당시 문제로 백담사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신군부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시작되자 1997년 고 노태우 전 대통령과 함께 내란목적살인죄, 군사반란 혐의로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2월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전씨는 그러나 이후에도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 전씨는 대법원이 선고한 추징금을 현재까지 완납하지 않은 것은 물론 2017년 내놓은 회고록에서 5.18을 '광주 사태'로 폄하하는 등 자신의 권력 찬탈과 민간인 학살 행위에 대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예금 자산이 29만원밖에 없다"(1997년. 추징금 2205억원 중 532억원 납부)회고록의 내용과 관련해 전씨는 5.18 당시 군부의 헬기 사격 사실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재판에 부쳐졌다. 전씨는 1심 선고공판 이후 건강상 이유로 계속 재판에 불출석하다가 집 앞 산책을 즐기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지난 8월 9일 광주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 출석한 전씨가 25분만에 건강 이상을 호소하며 퇴청하는 공식 석상에 노출된 마지막 모습. 연합뉴스"광주는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야. 계엄군이기 때문에 계엄군이 진압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2003년 2월 KBS 인터뷰)이후 수척해진 얼굴로 재판에 나온 전씨는 혈액암 진단을 받고 이날 결국 사과나 반성 한 마디 없이 세상을 떴다.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씨는 29일 결심공판을 앞두고 있었다. 역사적 심판은 물론 사법적 심판마저 끝내지 못한 것이다. "죽음조차 유죄(정의당 여영국 대표)"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