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후 부산 서구청 앞에서 초장어린이집 폐원 반대 집회에 나온 어린이들이 풍선과 피켓을 들고 있다. 박진홍 기자'아이 키우기 딱 좋은 도시'를 표어로 내건 부산 서구가 지역사회에서 20년 넘게 보육을 담당해 온 공립 어린이집을 돌연 폐원하겠다고 결정하자 학부모와 교사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23일 오후 부산 서구청 앞에서는 고사리손에 풍선을 든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집회에 나서는 낯선 풍경이 연출됐다.
부모들은 칼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생업을 뒤로한 채 구청을 향해 "제발 어린이집을 폐원하지 말라"며 구호를 외쳤다. 이 모습을 본 시민들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서명에 동참하거나, 음료수를 가져와 전달하기도 했다.
건물 오래돼 폐원 결정…학부모 "계속 말 바뀐다"
서구 초장동에 위치한 국공립 어린이집인 초장어린이집 학부모와 교사들은 구청이 일방적으로 폐원 결정을 내렸다며 반발하고 있다.
초장어린이집 소유주인 서구청은 지난달 초장어린이집에 원장과의 위탁계약이 끝나는 내년 5월 어린이집을 폐원한다는 내용을 통보했다. 학부모들이 이유를 묻자, 서구청은 "건물이 노후해 아이들 안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폐원을 결정했다고 답했다.
현재 원아 36명이 다니는 이 어린이집 건물은 지난 1977년에 지어져 내진 설계가 돼 있지 않은 상태다.
서구청에 따르면, 지난해 구조기술사 진단 결과 건물 내외부에 균열이 많아 지진이 발생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소견이 나왔다. 건물이 장기적으로 운영하기는 부적합한 상태인데, 내년 5월 위탁 운영 기간이 끝나는 만큼 이 시기에 맞춰 폐원을 결정했다는 설명이다.
23일 오후 부산 서구 초장어린이집 학부모와 교사로 구성된 대책위가 초장어린이집 폐원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박진홍 기자학부모들은 이러한 구청의 설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폐원 결정을 하기까지 어린이집 구성원들과 어떠한 논의도 없었던 데다 건물 안전성에 대한 구청의 판단 근거가 명확지 않고, 향후 대책도 전혀 마련해놓지 않았다는 게 이유다.
5살 아들을 둔 서희영(42·여)씨는 "구청에서 처음에는 정화조가 문제라고 했다가, 누수로 인한 감전 위험을 이야기했다가, 지금은 내진 설계가 안 됐다며 당장 무너질 것처럼 말한다"며 "계속 말을 바꾸며 폐원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초장어린이집에 2살 아들을 보낸 박수환(37)씨도 "건물이 당장 폐원을 해야 할 정도로 위험하다면서 건축물 안전진단은 의무시설이 아니라는 이유로 단 한 번도 하지도 않았더라"면서, "방법을 모색해 보다가 도저히 안 되면 모르겠지만, 지금껏 잘 운영하다가 갑자기 폐원하겠다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어린이집 이상의 공간…교사 "가장 걱정은 아이들"
23일 오후 초장어린이집 폐원 반대 집회가 열린 부산 서구청 앞에 한 어린이가 들고 온 어린이집 가방이 놓여 있다. 박진홍 기자학부모들이 폐원에 거세게 반발하는 이유는 더 있다. 초장어린이집은 서구 일대에서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으로 입소문이 나 있는 상태다. 교사와 원아 간에 유대관계가 깊게 형성돼 있고, 학부모들은 행사에 참여하며 서로 교류하는 어린이집 이상의 의미 있는 공간이라는 점 때문이다.
학부모 서희영 씨는 "이 어린이집은 보육 프로그램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고, 교재를 선생님들이 직접 만들고 아이들 먹는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써서 관리해 학부모들이 너무 좋아한다"며 "아이들 사진을 모아 분기마다 앨범까지 만들어줄 정도로 세심하게 신경 쓰는 곳은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구청의 폐원 결정에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교사들은 본인 일자리보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영향을 받지는 않을지 더 우려하고 있다. 현재 초장어린이집에는 교직원 10명가량이 종사하고 있다.
초장어린이집 10년 차 교사 문소희(41·여)씨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적응해 안정적으로 생활해오고 있는데 애착을 형성한 선생님과 헤어져야 하고,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상황을 겪어야 하는 게 가장 걱정"이라며 "어른들 편의에 의한 행정처리로 영유아 발달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서구청은 올해 들어 초장어린이집을 포함해 인근 국공립 어린이집 4곳을 폐원하거나 내년 상반기까지 폐원할 예정이다. 상반기에 폐원한 2곳은 원아 감소를 이유로 문을 닫았다. 그러는 사이, 다니던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 초장어린이집으로 옮겨 온 원아는 불과 수개월 사이에 또다시 새 어린이집을 찾아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라더니 "전원은 알아서"
그동안 서구는 '아이 키우기 딱! 좋은 부산 서구'를 표어로 내걸고 보육정책을 펼쳐왔다. 지난 8월에는 부산 원도심 최초로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을 받았다며 대대적인 홍보를 하기도 했다.
서구는 이번 초장어린이집 폐원도 아동친화도시 정책의 일환이라고 설명하지만, 폐원 결정만 내렸을 뿐 아동 전원이나 교사 일자리에 대한 보완책은 없는 상황이다.
부산 서구의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 인증 획득 홍보물. 부산 서구 제공서구청 관계자는 "아동들이 위험한 건물을 계속 사용하게 하는 건 아동친화도시 취지에 맞지 않다"면서도, "전원 조치는 구에서 어디로 가라고 정해줄 수는 없고, 학부모들이 인근 민간이나 국공립 어린이집에 스스로 전원 신청을 해야 한다. 교사는 수탁자가 채용했기 때문에 구가 고용을 승계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현재 초장어린이집 학부모와 교사들은 대책위를 꾸리고 폐원을 반대하는 서명운동과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건물을 사용할 수 없다면 구가 다른 공간으로 이전해 계속 운영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구는 폐원 입장을 고수하는 상태다.
공한수 서구청장은 "만약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있어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다면 학부모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며 "다만 교사는 구청과 어떠한 계약관계도 없는 만큼 이들을 만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