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우리나라의 수출은 월간 기준 처음으로 600억 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출입 화물이 쌓여있는 부산항 신선대·감만부두. 연합뉴스604억4천만달러. 지난달 우리나라 수출은 월간 기준 처음으로 600억달러에 진입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일등공신은 단연 반도체였다. 반도체는 전년 동기보다 40.1% 증가한 120억4천만달러 수출로 전체의 19.92%를 차지했다.
반도체는 11월 누계로 이미 지난해 연간 수출액을 넘어서는 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도 사상 최대 무역 실적을 주도하고 있다. 다만 "미국의 반도체 주도권 강화에 따른 미국·일본·대만의 반도체 동맹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도전이 될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와 주목된다.
4일 업계에 따르면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오늘의 세계 경제 -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리스크와 대응 방안' 보고서를 발표했다. 대외연은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재편을 넘어 우리 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한국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구조와 리스크를 분석했다고 설명했다.
수출 주력상품인 메모리반도체, 대(對) 중국 수출이 71.3% 차지
지난해 우리나라의 반도체 수출액은 954억6천만달러로, 제1 수출국은 전체의 43.2%를 차지한 중국이었다. 2위는 18.3%의 홍콩으로, 중국과 홍콩을 합치면 61.5%였다. 이어 베트남(9.6%), 미국(7.9%), 대만(7.1%) 등의 순이었다.
수출액 592억달러로 반도체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메모리반도체만 따로 보면 중국 의존도는 더 높아진다. 중국과 홍콩으로 각각 50.3%, 21%를 수출해 중국이 전체 메모리반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0%를 넘어간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해외투자. 대외연 보고서 발췌.한국 반도체 기업의 해외 투자는 중국에 압도적으로 집중돼 있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쑤저우·상하이 등에, SK하이닉스는 우시·충칭 등에 제조 시설과 후공정 거점을 구축하고 있다. 대중국 반도체 수출은 이들 기업이 생산 거점별로 반(半)제품과 최종제품을 주고받는 데서 발생한다.
대외연은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에 생산거점을 두고 중국 내 진출한 다국적 기업과 중국기업의 반도체 수요를 충족시키며 성장해 왔으나, 이제 미국의 자국 반도체 기술 통제정책 방향에 따라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SK하이닉스의 중국 우시공장 라인. SK하이닉스 제공실제로 SK하이닉스가 중국 공장에 반도체 초미세공정 핵심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배치하려는 계획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캐서린 타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첨단기술로서 민감하고 국가안보에 리스크가 될 수 있다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면서 미국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는 점을 사실상 인정했다.
반도체 장비 및 소재 수입은 대일 의존도 높아 공급망 '리스크'
지난해 한국의 반도체 수입액은 570억3천만달러로, 주요 수입 대상국은 중국(31.2%), 대만(20.4%), 일본(13.6%), 미국(11.0%), 싱가포르(6.5%) 등이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품목은 전체의 39.1%인 시스템반도체였고 메모리반도체(31.7%), 반도체 장비(13.5%), 장비용 부품(5.3%) 등의 순이었다.
반도체 장비의 경우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이 39.3%(30억2천만달러)로 가장 많고, 미국 21.9%(16억9천만달러), 싱가포르 19.9%(15억3천만달러)로 각각 2, 3위를 기록했다. 반도체 소재 수입 역시 일본(38.5%), 중국(20.5%), 미국(11.3%), 대만(8.3%), 베트남(4.1%) 등의 순으로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았다.
반도체 주요 소재 수입 동향. 대외연 보고서 발췌.특히 플루오린 폴리이미드(93.8%), 다이본드 페이스트(8.16%), 반도체용 포토레지스트(86.5%) 실리콘웨이퍼(56.6%) 등 특정 소재나 부품의 경우 대일 의존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강제징용 판결을 빌미 삼아 일본이 수출을 제재했던 불화수소는 대중 수입이 74.8%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제로는 중국에 진출한 일본 또는 외국계 기업으로부터의 수입이었다.
대외연은 "한국은 당분간 일본 소부장 산업에 위존해야 하는 기술적 취약성으로 관련 품목의 공급망 관리에 주의가 필요하다"며 반도체 제조 기초 원료와 함께 반도체 공정 수입 품목 중에서 한 국가의 점유율이 50% 이상을 차지하는 품목은 공급망 리스크 대상으로 간주해 상시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은 바이든 행정부 취임 이후 반도체를 포함한 핵심 산업의 공급망을 자국에 두려는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 공급망 관련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도 중국을 배제하고, 미국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
대외연은 "미국은 중국이 반도체 첨단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동맹국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을 포위하는 '디지털 만리장성'을 쌓아 철저하게 신기술 접근을 차단할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전략의 성패는 시장에 참여하는 글로벌 반도체 업체에 달려있다"고 전망했다.
'신냉전' 속에서 일본과 대만의 협력이 더욱 긴밀해지는 것은 우리에게는 위기가 될 수 있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는 일본의 대표 전자회사인 소니와 손을 잡고 일본 구마모토에 공동으로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했다.
삼성전자의 미국 제2파운드리 공장 투자 계획 발표 이후 악수를 나누는 그랙 애벗 텍사스 주지사(왼쪽)와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주지사 트위터 캡처다만 삼성전자는 미국에 170억달러(약 20조원) 규모의 제2 파운드리 공장 투자를 계기로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을 공고히 할 수 있게 됐다. 삼성전자는 기존 오스틴 공장에 이미 170억달러 이상을 투자했는데 이번 신규 투자까지 합치면 삼성의 미국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는 40조원 이상이 된다.
대외연은 "일본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해 지속적으로 견제할 것이고, 미국·일본·대만이 연계한 반도체 동맹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도전이 될 수 있다"며 "대일 의존도가 높은 품목에 대한 철저한 공급망 관리가 필요하며, 중장기적으로 원천기술 확보와 공급망 다변화에 심혈을 기울이며 동맹국과의 다각적인 외교 노력이 요구된다"고 제언했다.
대외연은 마지막으로 반도체 산업 지원 법안의 처리와 함께 △반도체 R&D 인력 확충을 위한 대책 마련 △대학 반도체학과 신증설 △반도체 전문대학원 설립 △반도체 종합연구원 설립 △국제 공동 R&D 투자 촉진 및 외국 R&D 센터 유치 △수도권에 반도체 공장 입지 지원 △중소벤처기업의 고급인력 채용 지원 등의 정책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