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현 기자아동·청소년 성범죄 피해자의 진술 녹화를 법정 증거로 쓸 수 없도록 한 헌법재판소 결정에 대해 법조계와 피해자 보호 단체 관계자 등이 당장 피해자들이 겪을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보호 사각지대에 놓인 아동·청소년 피해자를 위해 재판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보완책과 입법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법원 현대사회 성범죄 연구회는 10일 오후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영상녹화 진술 관련 실무상 대책'을 주제로 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달 성폭력처벌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데 따른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기존 조항은 미성년자 대상 성폭력 범죄 피고인이 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검사가 신뢰관계인이나 진술조력인을 증인으로 부르고, 재판부는 진술조서(피해자가 13세 미만일 경우 속기록)와 영상 녹화물을 증거로 써서 심리를 할 수 있게 했다. 법원 판단에 따라 피해자가 법정에서 가해 피고인을 대면하지 않아도 됐다. 법정에 나와 피해 진술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겪을 트라우마 재발과 2차 피해 등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지난 6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유남석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헌법소원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있는 모습. 황진환 기자그런데 헌재는 지난달 23일 성범죄 피해자가 법정에서 증언하지 않아도 진술 녹화를 증거로 쓸 수 있도록 한 이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피고인 방어권 제한 정도가 중대하다"며 "2차 피해를 방지할 다른 대안이 존재해 법익의 균형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토론 참석자들은 헌재가 미성년 성폭력 범죄의 재판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현실에 동떨어진 결정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해온 조현주 변호사는 "종전에도 정서적 어려움과 법정 진술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긴장감 등으로 피해자 진술이 원활하기 어려웠다"며 "피고인의 변호인이 모욕적·반복적 질문을 하고, 나이 어린 피해자를 위협하거나 다그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해 법정 증언 후 2차 피해를 호소한 경우도 다수였다"고 설명했다.
헌재는 이같은 현실을 고려해 증거보전 절차 강화, 비공기 심리 등 피해자 신상정보 누설 방지 제도, 비디오 등 중계장치를 활용한 증인신문, 피해자를 보호하는 재판장의 소송 지휘권 행사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참석자들은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헌재가 대안으로 제시한 제도 모두 증인신문 진행에 관한 것이지, 법정 출석 이전 단계에서 가해자의 회유·협박에 취약한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는 제도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오정희 서울고검 검사는 "재판과 수사 절차의 차이를 간과한 견해"라며 "수사 단계에서 증거보전을 거쳤더라도 피고인이 재판 단계에서 새 사실관계를 구축해 다투는 전략으로 '증거보전 절차에서 신문하지 못한 게 있으니 증인신문을 하게 해달라'고 하면 방어권 보장을 이유로 허가되는 경우도 상당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참석자들은 일단 위헌 결정이 나온 이상, 수사와 재판 절차에서 현존하는 제도로 피해자를 보호하고 반대신문권 보장을 최대한 조화시켜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근본적으로는 개선된 입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동현 사법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부장판사)은 "피해자를 반대신문에 노출시키는 것은 2차 가해로서의 본질을 지닐 수 있다"며 "심리 후 피고인의 방어권 남용이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추가 피해를 준 결과가 되므로 양형에서 불리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 증인신문 전 당사자들 사이에 공론화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해외 사례 등을 참조한 제도적 구상도 여럿 제시됐다. 박기쁨 연구위원(판사)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은 절대적 권리가 아니므로 피해자 보호를 위해 다소 제한될 수 있다"면서 "최소한 13세 미만 피해자를 위한 증거능력 인정 특례 등 제도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오선희 변호사는 북유럽 모델을 접목해 판사, 검사, 피의자, 피해자 변호사가 피해자 친화적 장소(보호시설 등)에 모여 질문을 정리한 뒤 전문 수사관에게 묻게 하고, 이를 바깥에서 지켜보며 녹화와 추가 질문을 하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