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산업개발 유병규 대표이사가 지난 12일 광주 서구 화정동 신축 아파트 외벽 붕괴사고 현장 부근에서 사과문 발표에 앞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을 앞두고 발생한 광주 현대아이파크 아파트 붕괴 사고에 대해 책임 소재가 어떻게 가려질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중대재해법 통과됐다면 책임자 처벌? 이번에도 '꼬리 자르기' 반복되나
사고 원인에 대해 '추운 겨울에 무리하게 콘크리트 타설을 강행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거듭 제기되면서 이번 사고 역시 인재(人災)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를 토대로 만약 오는 27일 시행 예정인 중대재해처벌법이 이미 시행됐다면,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 정몽규 회장 등 경영책임자까지 처벌받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물론 이를 뒤집어 말하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기 전에 빚어진 이번 사고에는 사업주, 경영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기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사고에 노동부는 현산 본사와 주요 시공현장에 대한 특별감독을 실시하고 원, 하청 현장관계자를 소환해 조사 중이다.
하지만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으로는 재해 발생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경우가 아니면 '윗선'의 책임을 묻기 어렵기 때문에 이번에도 실무자들이나 하청업체 대표들만 처벌받는 '꼬리 자르기'가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미 현대산업개발이 지난해 6월 광주 동구 학동에서 철거작업 중 건물이 무너졌을 때에도 현장소장 등만 법정에 섰고, 경영책임자 등은 법망을 피해간 바 있다.
중대재해법 시행 중이라도 처벌까지 쉽지는 않아…인과 관계·발주자 책임 등 '산 넘어 산'
지난 11일 HDC 현대산업개발이 시공하던 광주 서구 화정동 화정아이파크 신축 공사 현장에서 아파트 23~38층 외벽 붕괴했다. 사진은 13일 오후 건물 외부에 붕괴 잔해가 쌓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더 나아가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에 대형 산업재해가 발생하더라도, 그동안 경영계가 제기했던 우려와 달리 반드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까지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만은 없다.
물론 만약 실종자 중 한 명이라도 숨졌거나, 2명 이상 노동자가 전치 6개월 이상 중상을 입었다면 중대재해로 분류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를 가려야 한다.
하지만 이는 수사 대상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일 뿐, 실제 처벌로 이어질 지 여부는 더 많은 관문을 거쳐야 한다.
우선 실종된 노동자들이 하청업체 소속이기 때문에 시설, 장비, 장소 등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경우에만 원청업체 사업주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물론 이번 사고 현장은 현대산업개발의 시공현장인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운영, 관리 책임이 있는 도급인으로서 중대재해법이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광주 서구 화정동 신축아파트 붕괴사고 사흘째인 지난 13일 오후 현대산업개발 관계자가 구조활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하지만 현대산업개발 측의 주장대로 현대산업개발이 도급인이 아닌 발주자라면 더욱 법 적용에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비록 산업안전보건법에도 안전보건 사항에 관한 발주자에 대한 의무가 있지만, 산업 현장의 안전 전반에 대한 조치가 아닌 특정 상황에 대한 제한적인 사항만 다루고 있을 뿐이다.
반면 중대재해처벌법은 애초 법 취지가 실질적으로 지배·운영하는 경영책임자가 안전보건 의무를 다해서 재해를 예방하도록 하는 법이기 때문에, 이를 발주자에게도 확대 적용하려면 법적 공방이 빚어질 수 있다.
다음 단계로 사업주, 경영책임자 등이 과연 중대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보건에 관한 의무사항을 충분히 조치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동안 노동부는 △안전·보건에 관한 목표의 수립 △전담 조직이 설치 △유해‧위험요인의 확인 및 개선 △종사자 의견 청취 등 안전보건관리체계의 구축 및 이행 조치 등 9가지 의무 사항을 강조해왔다.
즉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후에 대형 산업재해가 터지더라도, 곧바로 경영책임자 등이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①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어기고, ②이 때문에 재해가 발생한 경우에 처벌받을 수 있다.
따라서 만약 정부가 중대재해처벌법을 적용해 처벌하려 해도 해당 기업이 명목상이나마 의무 사항을 지켰다고 주장하거나, 만약 일부 조치가 미비하더라도 실제 재해와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하고 나선다면 지리한 법정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기존 산안법·중대재해법으론 처벌 어려울 것…국회가 '건설안전특별법' 통과시켜야"
권기섭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장이 지난 10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2년 산재 사망사고 감축 추진 및 중대재해처벌법 현장 안착 추진 방향을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더 나아가 노동계는 애초 이번 사고가 기존의 산업안전보건법은 물론, 중대재해처벌법으로도 책임을 묻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한다.
민주노총 최명선 산업안전실장은 "우선 대기업들은 중대재해처벌법에 규정한 의무사항은 서류상으로 만족시켜놨을 가능성이 높다"며 "또 사고 원인으로 지목받는 콘크리트 타설 및 양생기간이나 구조 설계, 감리 문제 등은 기존 법은 물론 중대재해기업처벌법으로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도 공사기간에 대한 규정이 있다. 예를 들어 건설공사 발주자나 시공업체 등은 설계할 때 정한 공사기간을 함부로 단축할 수 없고, 시공업체가 공사기간 연장을 요청하면 발주자는 별다른 이유가 없으면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애초에 적정한 공사기간에 대한 개념이 산안법에 규정되지 않아 건설업계에 만연해 있는 무리한 공기 단축 관행이 되풀이된다는 것이 노동계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노동계는 현재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계류된 건설안전특별법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6월 더불어민주당 김요흥 의원이 대표발의한 건설안전특별법에는 △발주자가 적정한 공사비용·기간을 제공하는지 인허가기관장이 검토하고 △현장의 안전관리 책임을 시공자에게 귀속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해 노동부 관계자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책임 범위는 매우 넓은 편이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며 "예를 들어 콘크리트 양생 작업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진행했느냐 여부에 대해서도 중대재해처벌법에서 요구하는 위험성 평가 항목을 감안하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반면 최 실장은 "중대재해처벌법은 기존의 안전보건에 관한 법령을 준수하도록 했는데, 뒤집어 말하면 기존 법령에서 공사기간이나 타설·양생 등에 대한 규정이 제대로 없으면 책임을 묻지 못할 수 있다"며 "건설 현장의 재해를 부르는 핵심 원인인 공사기간을 적절히 규정하는 건설안전특별법까지 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