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이미지 제공2023년 새해가 밝았지만 노동 현장의 앞날은 밝지만은 않다. 화물차 운전기사의 최저임금을 보장해 과로·과적·과속을 방지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안전운임제'가 지난해 말일을 기준으로 폐지된 데다가, 노동권 보장을 위해 파업 참여 노동자에게 기업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한하는 '노란봉투법'은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30인 미만 사업장의 주 52시간 근무 안착을 위해 임시 시행됐던 '8시간 추가연장근로제' 또한 지난해 말일을 기준으로 폐지됐다. 하지만 국회 파행으로 관련 논의가 미뤄지면서 임시책으로 1년의 계도기간이 주어지게 됐고, 현장의 혼란만 가중됐다. 여야의 정치적 셈법에 따라 민생 관련 법안이 사실상 방치되면서 노동자들만 희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화물차 '안전' 위한 '최저임금'인데 폐지
의왕=박종민 기자'안전운임제'란 일정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화주에게 과태료를 부과하는 제도로, 화물차 운전기사에겐 일종의 '최저임금제' 같은 역할을 한다. 화물차 운전기사가 낮은 운임으로 과로·과적·과속에 내몰리는 것을 줄여 안전 수준을 높이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2018년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 통과로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하지만 당시 화주들의 반발 및 시장 혼란 우려 등을 이유로 수출입 컨테이너와 시멘트 등 2개 품목에 한해 3년 동안만 시행되도록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 2020년 1월 1일부터 시행돼 지난해 12월 31일 일몰(폐지)됐다.
폐지 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가 안전운임제 영구화 및 대상 품목 확대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까지 나섰지만, 일몰을 막지는 못했다. 심지어 정부는 총파업에 사상 최초로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는 등 강경 대응으로 나섰고, 화물연대는 결국 16일 만에 총파업을 철회했다.
화물차 업계에선 안전운임제 폐지로 당장 이달 계약부터 운송비가 최대 30%까지 깎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고유가 상황도 계속 이어지면서 실질적으로 화물차 운전기사가 가져가는 운임은 더욱 낮아질 전망이다.
화물연대는 올해에도 단식 투쟁을 이어가는 등 안전운임제 유지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정부가 올해 강력한 '노동개혁'을 예고한 데다가, 핼러윈 참사 국정조사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검찰 소환 등 현안으로 국회 파행이 계속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노동계 숙원사업 '노란봉투법' 여야 충돌로 진전 없어
강인석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 페이스북 캡처근로자와 사용자의 범위를 넓히고, 파업 등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 기업의 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에 대한 논의도 해를 넘겼다. 노동계의 오랜 숙원 사업으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힘을 실어왔지만 지난해 마지막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여야 충돌로 결국 불발됐다.
현행 노조법 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로도 합법 파업의 경우엔 기업이 파업 노동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다. 파업은 기업의 손해를 전제로 하는 노동운동 수단으로, 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할 경우 헌법이 보장한 노동권을 침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이 합법·불법 여부에 관계없이 파업 이후 일단 파업 참여 노동자에게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게 현실이다. 시민단체 '손잡고'에 따르면 1989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기업들이 파업 노동자 등에게 제기한 손배소 액수는 총 3160억원이 넘는다.
손배소가 제기되면 법원이 해당 파업에 대해 합법·불법 여부를 가리는데, 확정 판결이 나기 전까지 노동자들은 월급이 가압류되는 등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대법원까지 갈 경우 10년 넘는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어서 사실상 노동 운동을 위축시키는 효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반면 정부 여당과 재계 측은 '불법 파업까지 면죄부를 줄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된 관련 법안은 4건으로 상임위 단계에서 여야의 충돌로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마지막 국회를 앞두고 노동계 인사들이 민주당사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신년사를 통해 "2022년은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노동자·민중의 절박한 외침으로 가득했다. 택배와 화물, 조선 하청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노조법 2·3조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윤석열 정권은 폭압적인 탄압으로 일관했고, 국회는 외면했다"며 "노조법 2·3조 개정은 물러설 수 없는 우리의 과제로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고 투쟁을 예고했다.
'연장근로' 1년 계도…"장시간 노동 안돼" vs "현장 혼란 최소화해야"
스마트이미지 제공'주 52시간 근로제'의 연착륙을 위해 30인 미만의 사업장의 경우 노사가 합의에 이른다면 주 8시간까지 추가 근로가 가능하도록 하는 임시 보완책도 지난해 12월 31일을 기준으로 일몰(폐지)되긴 마찬가지다.
국회는 폐지 전 법을 개정해 추가 연장근로제 연장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여야 이견차로 상임위에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이에 정부는 영세·중소기업 사업주들의 혼란을 막겠다며 '1년'의 계도기간을 부여하기로 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30일 전국 기관장 회의에서 "603만명의 일자리를 책임지고 있는 63만 개소의 5~29인 사업장은 상시적 구인난을 겪고 있는데, 8시간 추가 근로제가 종료되면 인력 부족 현상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며 "현장 상황, 근로시간 제도 개편 등 입법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계도기간 연장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임시 미봉책에 불과해 현장 혼선만 가중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임시 조치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근로자의 진정이나 고소·고발이 있을 때 처벌받을 수 있는 위험은 여전해 중소기업계 우려를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상시 연장근로가 발생하는 사업장에 대해서는 추가 채용 인건비를 지원하고, 특별 연장근로제를 보다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인가 기간을 확대하고 사후 인가 절차를 완화해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노동계는 30인 미만 사업장에 주 52시간제가 안착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계도기간 동안 추가 연장근로를 허용하는 법 개정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우리나라 연간 노동시간은 1915시간으로 OECD국가 평균보다 200시간이 많다.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산재사망률 수준은 OECD 38개 국가 중 34위로 최하위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또다시 60시간 노동을 연장하겠다는 것은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외면하고 장시간·저임금 노동체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란 얘기다.
그러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주 52시간 상한제를 예외없이 적용하고 근로기준법의 정신에 맞게 주 40시간 노동제를 실현하는 것"이라며 "30인 미만 사업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장시간 노동체제를 유지할 것이 아니라 정부재정지원과 생활임금보장을 통해 해결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