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강의실. 연합뉴스 대학으로부터 강의를 배정받지 못한 채 급여를 받지도, 퇴직도 할 수 없던 한 국립대학 시간강사가 국가를 상대로 휴업수당을 청구했다. 시간강사의 휴업수당에 관한 사상 첫 소송의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13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경상국립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근무하던 하태규(58)씨는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국가를 상대로 휴업수당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한 학기 동안 대학이 하씨에게 강의를 배정하지 않아 급여를 받지 못했지만, 대학이 면직조차 해주지 않아 6개월간 휴업, 사실상 '실업' 상태에 빠졌으니 이를 보상하라는 요구다.
6개월간 '0시간 강의'…계약상 강사지만 사실상 '실업' 상태
하씨는 지난 2019년 9월부터 경상대 대학원 정치경제학과의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지난해 2월까지 학기마다 1, 2개씩 강의를 배정받아 학생들을 가르쳐왔다.
그런던 중 지난해 1학기 개강을 코앞에 두고 대학 측은 "이번 학기에 강의를 배정하지 않겠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통보를 보냈다. 하씨는 지난해 8월까지 계약상으로는 '강사'였지만, 강의를 하지 못해 6개월간 급여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당장 수입원이 끊긴 하씨는 생계를 이어갈 일이 막막했다. 하씨는 "아무래도 소득이 없으니 (생계가) 더 힘들어졌다"며 "학교 사정이 안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그렇게 되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특히 하씨는 전공인 정치경제학과의 시간강사 자리가 넉넉지 않아 다른 대학에서는 강의를 병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눈앞이 더 깜깜했다.
하씨는 곧바로 대학 측에 '강의 배정이 안 된다면, 실업수당이라도 받을 수 있게 면직을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대학 측은 "(시간)강사의 경우 고등교육법상 신분을 보장하게 되어 있고, 교육부의 대학 강사 제도 운영 매뉴얼 상 단순히 강좌가 폐강됐다는 이유로는 면직을 할 수가 없다"며 면직 처리를 거부했다.
결국 하씨는 강의도, 면직도 하지 못한 채 아무런 수입 없이 6개월을 보낸 뒤에서야 퇴직을 했다.
학교도 노동부도, "휴업수당 인정 안 돼"…법원의 판결은?
6개월간 하씨가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씨는 지난해 4월, 노동청에 휴업수당을 지급해달라는 진정을 넣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사용자의 귀책 사유'로 인해 노동자가 휴업을 하게 되는 경우, 사용자는 휴업기간 동안 노동자에게 임금의 100분의 70 이상의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하씨는 대학에 자신의 평균임금인 약 85만 원의 70%에 해당하는 약 59만 원의 6개월분인 360여만 원 가량의 휴업수당을 요구했다.
하지만 노동청은 "수강생 부족으로 강의가 이뤄지지 못할 경우 학교가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할 근거나 관행 등을 확인하기 어렵다"면서 "강의 개설이 어려울 경우에도 임용 기간을 보장하여 그 신분을 보장하는 것이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 취지인 것으로 보이는바, 휴업수당 지급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된다"며 사건을 종결했다.
하씨의 경우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2019년 8월 개정된 강사법(고등교육법 개정안)에 오히려 발목을 잡히게 됐다.
강사법. 연합뉴스강사법은 △강사 임용 기간은 1년 이상으로 해야 한다 △신규임용을 포함하여 3년까지 재임용 절차를 보장해야 한다 △강사에게 교원 지위 부여 △강사에 대한 퇴직금 지급과 4대 보험 가입 의무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최소 강의 시간 보장'에 대한 내용은 없어, 하씨의 강의할 권리나 수입이 아닌 '신분'만 보장된 것이다.
실제로 하씨의 계약서에는 '강사는 학기별로 주당 6시간 이하의 교수 시간(강의 시간)을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만 있을 뿐, '최소 몇 시간 이상'의 강의 시간을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결국 대학 측으로부터 휴업수당을 받지 못한 하씨는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휴업수당 청구의 소'를 제기해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경상대도 하씨에게 강의 능력 부족 등 귀책 사유가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하씨가 강의를 못 한 책임이 학교에 있는 것도 아니기에 휴업수당을 지급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경상대 관계자는 "우리(대학)가 (하씨에게) 강의를 최대한 배정을 해왔는데, 해당 학기에는 수강신청자도 적었고 수요가 없었기 때문에 배정할 수 있는 강의가 없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또 "(강사 임용 계약서에도) '강의가 없는 학기에는 별도로 임금을 지급하지 아니한다'는 규정이 있다"고 덧붙였다.
'0시간 강의'하는 시간강사 多…시간강사 처우 개선 시급
스마트이미지 제공최근 지방을 중심으로 대학 재정이 악화되면서 하씨처럼 대학에 발이 묶인 채 강의도 못하는 일이 적지 않다.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박중렬 위원장도 이러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박 위원장은 "정상적인 근로 계약 관계라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고, 일하는 동안에 근로 시간, 즉 한 학기에 몇 시간을 강의를 하고 (이런 내용을 포함해) 계약을 맺는 게 통상적이지만, 대학마다 계약하는 방식이 다르다"며 "대학에서 강사 채용에 있어서 어떤 방식을 취하느냐에 따라, 강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저출생 시대에 학령 인구가 감소하면서 이러한 사례가 더 늘어날 것이라 내다봤다. 박 위원장은 "학령 인구가 감소하고 학생 수가 줄어들면 대학이 재정이 부족하게 되니까,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대학이 재정 절감 정책을 펴게 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제일 먼저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 시간강사들"이라고 꼬집었다.
하씨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직장갑질119 윤지영 변호사는 근본적으로 대학이 일방적으로 강의 배정의 칼자루를 쥐고 있기 때문에 시간강사들은 매 학기 불안에 떨게 된다고 지적했다.
윤 변호사는 "강의 시간을 대학에서 정하고 시간 강사의 임금은 강의 시간에 따라 이제 정해지다 보니까 들쑥날쑥한 것"이라며 "극단적으로 사실상 강의 배정을 안 해버리면 그냥 한 푼도 못 받게 되는, 임용 계약을 맺었지만 사실상 실업 상태로 아무런 급여 없이 생활을 해야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불안은 '0시간 계약'(Zero-Hour contract)이 가능한 현실 때문이다. '0시간 계약'은 소정 근로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채로 계약을 맺고,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근로 형태를 말한다. 하씨처럼 시간강사 중 상당수는 '최소 강의 시간'을 보장받지 못한 채 '0시간 계약' 형태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
윤 변호사는 "현행 근로기준법이 소정 근로 시간이라는 걸 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시간 강사를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이 근로계약을 유지하면서도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에 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근로계약을 맺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의 경우 0시간 계약을 규제하거나 금지하는 경우들도 있고 최소 근로 시간은 정하도록 강제하는 경우들이 여럿 있다"며 "우리나라 또한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