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류영주 기자"4년 간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권모(37)씨는 2019년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다. 그는 지난 4일 CBS노컷뉴스 취재진에 "뉴스에서만 보던 일이 나한테 발생하니 악몽이 따로 없었다"고 4년 전을 떠올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상기된 표정이었다.
수원 영통구 일대 건물 28개 동을 가지고 있던 변모(63)씨가 파산한 게 2019년 5월이다. 변씨는 대출을 받아 건물을 짓고 전세보증금으로 공사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건물들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렸다. '깡통전세'였다.
권씨가 살고 있던 고시원의 전세보증금 6500만 원도 변씨의 파산과 함께 공중으로 사라지게 됐다. 당시 권씨와 같은 피해자만 최소 450여명에 피해액도 480여억원에 달했다.
피폐해진 피해자의 삶…결혼 미루고, 신혼생활 포기
전세사기 피해자 대책마련 촉구 집회. 연합뉴스이때부터 권씨와 피해자들은 소송과의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수많은 민·형사 소송을 감당해내는 동안 피해자들의 몸과 마음은 모두 피폐해졌다.
"우선 변씨에게 형사상 책임을 물기 위해서는 변씨가 '사기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밝혀야 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직접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권씨는 당시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장미빛 신혼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억울하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 달을 변씨가 임대사업을 목적으로 만든 법인의 직원들을 쫓아다녔다. 눈물을 머금고 밥도 사고 술도 사며 회유했다.
고생 끝에 변씨가 금융기관에서 담보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20여 명의 전월세 임대차 계약서를 위조한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권씨의 결혼은 이미 1년이나 뒤로 미뤄진 상태였다.
이후 결혼 후에도 권씨의 신혼생활은 좀처럼 정상적인 궤도에 오를 수 없었다. 권씨는 수시로 경찰과 검찰을 오가며 참고인 조사를 받아야 했고, 필요한 증거를 수집하는 데 대부분의 휴가도 소진됐다. 무엇보다 권씨가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결혼을 하고도 신혼집을 마련하지 못해 아내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권씨는 "결혼 이후에도 반년을 원룸에서 혼자 살며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며 "경찰 조사를 마치고 지쳐서 집에 돌아와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며 힘겨웠던 그때를 기억했다.
부족한 법률 지원…자체적으로 민사 소송 준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 지원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권씨 등 피해자들 대부분은 지난 4년 동안 가장 도움이 절실했던 부분은 법률적 지원이라고 입을 모았다.
관할 지자체인 수원시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법률 자문을 지원했지만, 변호사 선임부터 소장 접수 등 소송과정의 대부분은 오롯이 피해자들의 몫이었다.
소송은 변씨를 상대로 한 전월세보증금 반환 민사 소송부터 공인중개사협회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 이르기까지 20건을 넘었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서 중개 매물에 대해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공인중개사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했다.
급기야 변씨가 파산 직전 배우자에게 수원의 아파트와 공장용지 등을 증여한 사실을 확인하고 소유권을 변씨에게 다시 돌려놓기 위한 '사해행위 취소 소송'까지 진행했다. 변씨가 배우자에게 빼돌리려 했던 재산을 돌려놔야 소송에서 이겼을 때 받을 돈이 있기 때문이다.
권씨는 "때로는 인터넷을 뒤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어 힘겹게 민사 소송을 진행했다"며 "당시 정부와 지자체는 피해자를 지원한다고 했지만, 큰 도움은 받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끝없는 재판의 연속…무너진 피해자들의 삶
연합뉴스수십 건의 소송과 재판을 진행하면서, 피해자들의 일상은 갈수록 망가져만 갔다.
권씨는 근무 중 갑자기 심한 손 떨림 증상을 느꼈다. 결국 정신과 진료를 받고 우울증과 불안장애, 난독증 진단을 받았다. 권씨가 복용하고 있는 정신과 약만 7종류에 달한다.
권씨는 "극도의 정서불안을 겪어야 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며 "결국 정신적 스트레스와 소송에 시달려 올해 1월에 병가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박모(35)씨도 예외일 순 없었다. 박씨는 피해자들이 계약 당시 받았던 중개대상물 설명서 수백 건을 수집하고 분석하기 위해 자기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박씨는 "당시 나이가 29살이었는데, 몇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하루아침에 날렸다는 사실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돈을 되찾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털어놨다.
4년 째 이어진 소송…피해 변제는 '0원'
황진환 기자4년이 지났지만, 권씨와 피해자들의 싸움은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지난해 11월 변씨는 징역 9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사해행위취소 소송은 재판부가 "이혼에 따른 재산분할을 빙자해 아파트와 토지 등 재산을 처분한 재산처분행위에 불과하다"며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이 역시 변씨가 항소를 제기했다. 다른 민사 소송 역시 아직 확정 판결이 나오지 않았다.
4년이 지났지만 피해자들은 아직 단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권씨는 "변씨는 파산하기 직전까지 고급 외제차를 타고 골프장도 자주 다녔던 것으로 알려졌다"며 "피해자들의 고통은 계속되고 있는데, 가해자는 징역살이를 끝내고 나오면 떵떵거리며 살 거라고 생각을 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