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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붙이기식 화전정리', 행정도 '우왕좌왕'

전북

    '밀어붙이기식 화전정리', 행정도 '우왕좌왕'

    편집자 주

    천년 사찰 전북 김제 금산사 뒤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김제 금동마을 일대 주민, 뽕밭 등을 일구며 살던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 송두리째 무너졌다. 47년 전, 화전민으로 몰려 마을 전체가 헐리고 공동묘지로 내쫒겨 짐짝처럼 내팽개쳐졌다. 대신 지원한다던 땅은 지금까지도 감감무소식. 어느덧 대부분 촌로로 변한 마을 주민들, 수십 년의 한과 설움을 간직한 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전북CBS는 5회에 걸쳐 산림녹화사업의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있는 화전민 공동묘지 집단 이주 사건의 이면을 짚어본다.

    [한 맺힌 47년…공동묘지에 버려진 사람들③]
    당시 국회 내무위원회, "이주보상비 미흡, 인상 필요" 강조
    출석 산림청장, "정부 재정 형편 상 현행대로 밀어볼 것" 강행 밝혀
    예산 부족 화전민 이주 지연, 현황 파악 착오 등 문제 불거져
    동일 행정구역 내 화전민 이주 방식 천양지차, 논란 야기

    정든 땅을 떠나는 화전민 가족, 눈시울 붉히는 이웃(사진 김수익). 뿌리깊은 나무(한국의 재발견·강원도편) 정든 땅을 떠나는 화전민 가족, 눈시울 붉히는 이웃(사진 김수익). 뿌리깊은 나무(한국의 재발견·강원도편) 
    ▶ 글 싣는 순서
    ①왜 우리를 공동묘지로? 무덤과 동거, 짓밟힌 인권
    ②땅 준다며 내쫓더니…반세기 가까이 나몰라라
    ③'밀어붙이기식 화전정리', 행정도 '우왕좌왕'
    ④'화전정리법'의 빛과 그림자, 우려가 현실로
    ⑤사과와 치유을 위하여, 정치권·법조계의 시각은?


    1970년대 화전정리사업 당시 국회에서도 화전민 생계대책 문제가 꾸준히 거론됐으나 예산 상의 이유로 번번이 묵살됐다는 사실을 CBS가 국회 속기록을 통해 확인했다.

    또, 화전민 생계대책과 이주 문제는 당시 전북 김제군 뿐 아니라 완주와 남원 등 다른 지역에서도 불거졌다.
     
    이주 화전민에 대한 예산 대책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당시 산림청은 화전정리사업을 밀어붙였다는 내용이 국회속기록에 담겨 있다.

    1976년 11월 9일 당시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장동식 의원은 "40만 원의 이주보상비로 어떻게 정착할 수있냐?"며 묻고 산림청 소관을 넘어선 정부 차원의 정착 계획을 산림청장에게 주문했다.
     
    하지만 당시 손수익 산림청장은 "완전한 대책 수립에 동의하지만 국가의 여러 여건이 이를 허용하지 못한다"고 답변했다.
     
    또, "이주이주 화전민의 완전한 안착을 자신하지 못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1976년 국회내무위 산림청장 답볍(좌), 1977년 국회내무위 산림청장 답변(우). 국회속기록  1976년 국회내무위 산림청장 답볍(좌), 1977년 국회내무위 산림청장 답변(우). 국회속기록  
    1년 뒤인 1977년 11월 2일 국회 내무위원회.
     
    문태갑 의원이 물가인상 등을 들어 '이주이전 보상비 인상'을 거론하자 손수익 산림청장은 "인상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정부 재정 형편상 현행대로 밀어보겠다"며 강행 의지를 내비췄다.

    전북에서 이주 대상 화전민이 가장 많았던 완주군(235가구)의 경우 보상비를 제때 확보하지 못해 이주를 못하고 있다는 당시 언론 보도가 있었다.
     
    실제 완주군 운주면 김성근(61)씨는 "운주면 대궁동에 당시 이주 대상 화전민이 7가구였는데 주택 건축이 늦어져서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화전민 현황 파악의 착오도 문제를 일으켰다.

    남원군에서는 이주 대상 화전민이 없다고 중앙에 보고했다가 뒤늦게 87가구를 이주 대상에 포함시키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에 놓였다.

    국가 예산을 배정받지 못하면서 뒤늦게 하천 부지나 군유지 개간 등 부랴 부랴 이주대책 수립에 나서기도 했다.
     
    1975년 당시 전북신문(현 전북일보) 등 지역 언론이 화전민 대책에 우려 섞인 시각을 기사에 담았다. 전북대학교 도서관  1975년 당시 전북신문(현 전북일보) 등 지역 언론이 화전민 대책에 우려 섞인 시각을 기사에 담았다. 전북대학교 도서관 
    당시 남원군이 독가촌을 중심으로 현지 조사를 한 뒤 이주 대상자가 없다고 보고하는 바람에 빚어진 일(전북신문 1975년 11월 26일자 보도)이다.

    이같은 현장 조사의 착오로 인해 전라북도의 전체 현황 파악도 차질을 빚었다.

    애초 중앙에 보고했던 전북지역 이주 대상 화전민은 57가구 그리고 이전 대상은 8가구 등 모두 65가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재조사 과정에서 이주‧ 이전대상 가구가 10배 가까이 늘었다.

    1975년 당시 전북지역 화전실태조사에 따르면 1만 627ha의 화전 가운데 △산림 복구 대상 5022ha △농경지 조성 대상 5776ha이다.
     
    또 화전 가구수가 50296가구에 이르는 가운데 △이주 대상 426가구 △이전 대상 128가구 등 이주 또는 이전 대상 화전 가구가 554가구에 달했다.

    현장에서의 혼선은 실질적 화전민(독가촌)과 달리 '화전민 아닌 화전민', 다시 말해 법률적 화전민(경사도 20도 이상 거주 또는 경작)이 존재했고 이들이 휠씬 많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1970년대 조성된 화전민 집단 이주촌(김제 모악동), 지금도 가옥들이 대부분 당시 외형을 갖추고 있다. 김용완 기자1970년대 조성된 화전민 집단 이주촌(김제 모악동), 지금도 가옥들이 대부분 당시 외형을 갖추고 있다. 김용완 기자
    화전민 지원 방식의 차이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CBS가 화전민 집단 이주단지인 전북 김제 모악동 마을의 등기부 등본·토지대장을 살펴본 결과, 1973년 당시 김제군이 땅을 사서 주택을 지은 뒤 독가촌 26가구를 집단 이주시킨 것으로 파악됐다.

    김제 모악동에는 현재도 2가구가 남아있는 데 이곳에 사는 홍학기(93)씨는 "당시 김제군에서 땅을 사서 주택을 신축·지원했다"고 말했다.

    생계대책없이 공동묘지에 이주시킨 김제 금동마을 건과 대조적이어서 동일 행정구역 내 지원 방식에 차이는 논란거리일 수 밖에 없다.
     
    화전정리법에는 국가가 이주이전 주민들을 위해 생계대책를 마련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지만 당시 산림청장의 국회 발언처럼 예산 문제로 정부도 이를 자신하지 못했다.
     
    지금은 폐지된 화전정리법, 당시 법 제정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주 또는 이전 화전민의 생활안정이었다.
     
    화전정리사업이 국토의 산림녹화라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과를 내는데 일조했지만 화전민의 생계대책은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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