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군 보복 공습 받는 가자지구. 연합뉴스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양측간 전쟁으로 확대된 가운데 그동안 미국 등 서방진영의 대중 견제에 맞서 중동에서 꾸준히 영향력을 넓혀가며 우군확보에 주력해왔던 중국 외교 역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중립' 깃발 든 중국 "평화회담과 두 국가 해법 실시"
이번 사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한마디로 '중립'이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9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갈등의 악순환을 해결하는 길은 평화회담을 재개하고 '두 국가 해법'을 실시하며 정치적 수단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를 조기에 포괄적이고 적절하게 해결하도록 촉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오 대변인이 밝힌 대로 중국은 그동안 양측의 갈등 해결 방안으로 '두 국가 해법'을 주장해왔다. 이는 지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 경계선을 기준으로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만들어 이스라엘과 공존하게 만들자는 구상이다.
중국은 타 국가의 분쟁에 대해 최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자제한다는 원칙에 따라 중립 입장을 취하고 있다. 대신 양측이 원한다면 중재자 역할은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고려했을때 현실을 무시한 원론적인 입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지난 3월 갈등을 빚어온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간 7년 만의 국교정상화를 중재하는 등 일부 성과를 냈던 것도 사실이다.
연합뉴스실망감 드러낸 이스라엘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무력충돌로 9일까지(현지시간) 양측의 사망자만 1500명에 육박한데다, 하마스에 끌러간 인질이 100명에 이르는 등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이같은 원론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여론도 높아지고 있다.
당장 이스라엘과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은 중국의 어정쩡한 입장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중동 국가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중국의 입장에 실망스럽다는 뜻을 밝혔다. 당장 그동안 추진돼 왔던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중국 방문도 불투명해졌다.
중국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은 엑스(구 트위터) 공식 계정에 "우리는 중국이 이 어려운 시기에 이스라엘에 연대와 지지를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대사관 관계자는 보다 직설적으로 "사람들이 거리에서 살해되고 학살당하고 있는데 지금 해결책으로 두 국가 해법을 요구할 때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이스라엘 국가안보연구소의 투비아 게링 연구원도 "이번 사태에서 중립적인 입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유엔에서의 중국의 대응은 인도주의와 국제법을 위반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비인도적 야만 행위의 명백한 증거 앞에서 부도덕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날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척 슈머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시 주석의 면전에서 중국의 입장을 비판했다. 그는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중국 외교부 성명이 이스라엘에 대한 어떤 동정이나 지지도 표하지 않은 점에 매우 실망했다"라고 말했다.
당장 미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대중 견제에 동참하고 있는 서방국가들이 9일(현지시간)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을 '테러'로 규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 했는데, 향후 중국에 명확한 입장을 밝히라는 서방진영의 압박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척 슈머 미국 상원 원내대표(왼쪽 두번째)와 왕이 중국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오른쪽)이 9일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국빈관에서 만나고 있다. 이날 슈머 의원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 대한 중국의 대응에 불만을 표출하며 이스라엘 지원을 촉구했다. 연합뉴스지지해 달라면서 정작 중국은 중립? 중동 국가도 불만
반대로 최근들어 부쩍 중국과 가까워지고 있는 중동 국가들 입장에서도 향후 중국의 이같은 기계적인 중립에 불만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중동 국가들은 근본적으로 양측의 갈등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당장 이슬람 시아파 맹주인 이란은 이번 사태에서 하마스를 직접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를 추진해왔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조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인 마흐무드 압바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편에 서 있으며 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지지 입장을 밝혔다.
중국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국가들을 브릭스(BRICS) 회원국으로 끌어들이는 등 중동 국가들을 상대로 우군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 주석의 핵심 대외 확장전략인 '일대일로'(一帶一路)도 중동 국가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시 주석은 지난 8월 22일 열린 브릭스 회의 연설에서 "어떤 나라는 패권적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신흥시장국과 개발도상국을 압박하고 있다"며 미국을 겨냥한 뒤 중동 국가들을 비롯한 신흥국가들이 중국의 편에 서서 이에 맞서야 한다는 뜻을 밝힌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작 중동에서 전쟁이 벌어졌음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공동 친구'라며 원론적인 입장만 강조하는 중국을 중동 국가들도 우군이라 생각할지는 미지수다.
중국보다 미국 타격 더 커 '어부지리' 분석도
연합뉴스
다만, 일각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전쟁으로 미국이 주도해온 '중동 데탕트'가 유명무실해 지면서 오히려 중국이 유리한 상황을 맞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사태로 중국도 타격을 입게 됐지만 미국이 받게 될 타격이 더 크기 때문에 중국이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이후 약화된 대중동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국의 최신 무기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간 관계 정상화를 중재해 왔다.
이는 중국의 일대일로 추진은 물론이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간 국교 정상화를 중재하는 등 경제.외교적 성과를 내며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해온 것에 대한 위기감이 반영된 것이라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전쟁에 사우디아라비아가 팔레스타인 지지 입장을 밝히면서 미국의 중동 데탕트는 사실상 물건너간 일이 될 공산이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 뉴욕타임스(NYT) 인터넷판은 10일 이번 사태를 "미국의 영향력 약화와 다극화 체제 전환의 상징적 사건"이라고 규정하며 미국의 영향력 감소를 틈타 중국이 대안 세력으로서 영역을 확대해 갈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