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열린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설명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 위원장(왼쪽)과 무적 위원장이 손피켓을 들고 있다. 황진환 기자인천시와 인천시의회가 전세사기 피해가정을 지원하기 위해 내년에 배정한 예산이 기존보다 80%가량 줄여 비판이 일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피해 구제에 사실상 손을 놨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천시, 전세사기 피해 지원액 1억원이 전부…내년 예산 대폭 삭감
인천시의회 건설교통위원회는 29일 내년도 예산 심의위원회를 열어 올해 편성된 전세사기 피해 지원 예산 62억원을 불용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전세피해 지원 예산을 다른 용도로 바꿀 수 없다는 이유다.
이에 따라 내년도 인천 지역 전세사기 피해 지원 예산은 인천시가 새로 편성한 11억원으로 줄어들 예정이다. 이 예산안은 다음 달 예정된 인천시의회 본회의 표결을 통해 확정된다.
앞서 인천시는 미추홀구를 중심으로 불거진 전세사기 사건으로 세입자 4명을 세상을 떠나는 등 사태가 커지자 올해 4월 전세사기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추가경정예산으로 63억원을 배정했다. 이 예산은 정부의 전세사기 피해 지원이 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찾아 인천시민의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당시 인천시가 편성한 예산은 대출이자 지원 2000가구, 월세 지원 600가구, 이사비 지원 500가구 등이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인천시가 실제 예산을 집행한 건 긴급주거 이사비 1억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지난달 19일 열린 인천시 국정감사에서 전세사기 지원 예산을 5556만원(0.88%) 밖에 집행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부랴부랴 집행을 늘린 탓이다.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장은 "정부나 지자체가 전세사기 피해 지원 대책을 발표했지만 정작 피해자들이 받은 지원은 거의 없다"며 "피해자들이 지원을 이미 받고도 더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 피해자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고 하소연했다.
안상미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장이 지난 4월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가진 전세사기·깡통전세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류영주 기자 '빌라왕·건축왕·청년 빌라왕' 소유 주택만 3008채 몰린 인천
인천은 전국에서 전세사기 피해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다. 인천시가 자체 파악한 자료를 보면 이른바 '빌라왕', '건축왕', '청년 빌라왕' 등 전세사기 주범들이 소유한 주택 대부분이 인천에 몰려 있고, 그 가운데서도 미추홀구에 집중됐다.
전세사기 주범 3명이 인천에서 모두 3008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2523채가 미추홀구에 집중됐다. 전세사기 피해로 세상을 떠난 희생자도 미추홀구에서만 4명이나 나왔다.
지금까지 접수된 전세 피해자만해도 2220건이고, 이 가운데 1824건이 정부로부터 피해 인정을 받았다. 전세피해 지원 특별법에 따라 경매 유예로 쫓겨나지 않고 기존 주택에 거주하는 가구는 1372가구에 이른다.
피해자들 "반복되는 단수·단전 위기…주거환경 개선이라도"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그동안 전세사기 지원 예산 가운데 남은 62억원을 생활지원비 등으로 변경해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전세사기 주범인 건축왕 A(61)씨가 구속기소되면서 피해 주택에 대한 보수·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를 제때 납부해도 건물주가 구속된 상태여서 건물 관리에 손을 놓고 있어 단수가 반복되거나 단전 위기에 몰린 주택도 나왔다. 일부 주택은 승강기가 고장 나서 이용할 수 없고, 주택 천장이 무너지거나 물이 새는 등 살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곳도 있다.
피해자들은 지난 27일부터 인천시청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는 등 미처 쓰지 못한 예산 62억원의 집행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천시와 인천시의회는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인천시가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인천 지역 각 기초자치단체 의회 의장으로 구성된 인천시 군·구의회 의장협의회도 시를 압박하고 있다. 협의회는 지난 24일 회의를 열어 '전세사기 지원 대책 촉구 결의문'을 채택했다.
각 군·구 의장들은 결의안을 통해 "전세사기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고도 피해 임차인들에게 실질적인 지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며 인천시를 압박했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주택 모습. 사진 맨 위 왼쪽부터 누수로 천장에 곰팡이가 생긴 주택의 모습, 승강기 고장나 안전 문제로 사용금지 스티커가 부착된 모습. 누수 등의 이유로 천장이 내려 앉은 모습.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대책위 제공"정당현수막 철거는 위법 논란 있어도 강행…전세사기 지원은 침묵"
시민사회단체들도 인천시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유정복 인천시장이 최근 위법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당 현수막 철거'는 조례로 제정해 강행한 반면 전세사기 피해 지원 조례 제정에는 소극적이라는 점을 꼬집었다.
앞서 인천시는 지난 6월 난립하는 정당현수막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전국 지자체 최초로 '인천시 옥외광고물 조례'를 개정했다. 이 조례는 정당 현수막을 지정 게시대에만 게시하도록 규정하고, 설치 개수도 국회의원 선거구별 4개소 이내로 제한하며 현수막의 내용에는 혐오와 비방이 없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행안부는 인천시의 개정 조례가 상위법의 위임이 없어 위법하다며 인천시를 대법원에 제소했고, 대법원은 지난 9월 이를 기각했다. 당시 유 시장은 "이 조례와 같이 시민들의 불편을 개선하고 안전한 도시를 만들 수 있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냈다.
이광호 인천평화복지연대 사무처장은 "유 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전세 사기 피해자들이 어려움을 덜 수 있도록 인천시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고 정부에도 제도 개선과 대책 마련을 적극 건의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며 "인천시가 모든 시민들의 행복과 안전을 책임지는 행정을 펼치길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