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서울 중구 명동 버스정류소 인근 풍경. 김수진 수습기자최근 '퇴근길 버스 대란'을 빚은 명동입구 정류소와 관련해, 서울시가 사전 시뮬레이션과 같은 기초 준비작업조차 없이 관련 사업을 밀어붙인 것으로 드러났다.
'명동 버스 대란' 그 후…시민들은 여전히 '혼란'
지난 12일 퇴근시간 무렵의 서울 중구 명동정류소는 여전히 혼잡스러운 모습이었다. 약 200m가 넘는 대기 줄이 늘어져 있었고,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줄을 선 사람들과 맞부딪히기도 했다.
시민들은 "이게 대체 무슨 줄이냐", "지금 이거 버스 기다리는 거냐"며 웅성댔고, "잠시 지나갈게요"라는 말이 연신 들려왔다.
줄이 길다보니 시민들은 계속해서 자신이 타야할 버스가 왔는지 확인하려고 목이 빠져라 두리번 거렸고, 한 중년 여성은 자신이 타야할 버스가 도착했지만 앞에서 줄이 끊기자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20대 성모씨는 "표지판을 세우면서 번호가 안 쓰여 있던 버스들도 자리가 지정돼서 멈추다 보니 버스들이 길어지는 게 심해졌더라"면서 "정책을 바꾸기 전에 미리 좀 와서 현 상황을 보고 생각을 했다면 충분히 이런 상황 예측을 할 수 있었을 건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긴 하다"고 말했다.
경기 화성시에 사는 김아름(30)씨 또한 "정책이 바뀌면서 줄이 또 엄청 길어지고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졌다"면서 "표지판 설치가 근본적인 해결은 아닌 것 같고,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을 생각해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 또 정류장도 바뀐다 하고 이런 이야기들이 있으니까 조금 혼란스럽긴 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시 송파구에 사는 김모(29)씨는 "왜 서울시가 이런 식으로 밖에 할 수 없었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났다"면서 "현장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조금만 들어봐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굉장히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서울시는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명동입구 버스정류소에 노선 표시 안내판(줄서기 표지판)을 설치했다. 도로 위 승차 등 무분별한 승차를 막기 위해 노선별 표지판을 세워 줄서기를 유도하고 그 자리에서만 버스를 탈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오히려 도로 상에 정차하는 버스가 많아져 대기 시간이 크게 늘어나 시민들의 불만만 커졌다. 결국 서울시는 지난 5일 줄서기 표지판 제도 운용을 오는 31일까지 유예하기로 했다.
대란 자초한 서울시, 사전 시뮬레이션도 설문조사도 안 해
이러한 혼란을 자초한 건 다름 아닌 서울시다. 더불어민주당 임규호 서울시의원실과 같은 당 홍기원 의원실이 서울시로부터 받은 자료 <광역버스 노선 대기표지판 운영 사업 실시 전 시뮬레이션/설문조사 현황>에 따르면, 서울시는 줄서기 표지판을 설치하기 전에 시뮬레이션조차 실시하지 않았다.
'시뮬레이션'은 교통 운영 정책을 변경하거나 시행하기 전에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통상 정책 준비 단계에서는 BISSIM, PARAMICS 등 '미시적 교통분석 시뮬레이션'(micro simulation)을 실시해 정책으로 인한 변화를 파악한다. 미시적 교통분석 시뮬레이션을 활용할 경우, 개별차량의 가감속, 차로변경, 차량추종 등까지 매우 자세하게 표현이 되기에 실제 상황과 비슷한 교통흐름을 산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대 유정훈 교통시스템공학 부교수는 "이런 중요한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시뮬레이션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미시적 교통분석 시뮬레이션을 했다면, 정책 이후 발생할 수 있는 주요 상황들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과 같이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정책을 펴기 전에는 전문가 및 전문기관에 의뢰해 시뮬레이션을 시행한 후, 정책 전후로 어떠한 여건 변화가 생기는 지를 면밀히 분석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시뮬레이션 작업을 하지 않은 서울시는 '혼잡도를 파악해 시행계획을 수립했다'는 해명을 내놓았다. 국토교통부 <도로용량편람>에 따른 '정류소 용량산출'에 따라 혼잡도를 사전에 파악했다는 것이다.
서울시가 혼잡도 파악에 활용했다는 국토교통부 도로용량편람의 '정류소 용량 산출' 수식. 국토부 도로용량편람 캡처하지만 겉보기에만 그럴 듯 할 뿐, 사실상 단순 수식에 의한 이론적인 계산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차 시간, 정차면당 시간당 최대 버스수 등의 데이터를 정해진 수식에 넣어 결괏값을 산출했을 뿐, 실제 현장 상황을 반영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경기대학교 스마트시티공학부 김정화 교수는 "대란 당시 문제가 됐던 것이 그 주변에 엄청난 대기 행렬이 발생을 했다는 것인데, 그 부분은 수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무조건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 또한 "수식만 가지고 계산하면, (표지판 설치에 따른) 복잡한 모든 상황을 사전에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한국교통안전공단 하승우 교수도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 양면을 봐야지, 수치로만 계산하는 등 탁상행정만 하면 되겠냐"고 말했다.
심지어 서울시는 줄서기 표지판을 설치하기 전, 현장의 시민들의 의견수렴 과정조차 거치지 않았다. 서울시는 "별도의 설문조사를 거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 교수는 "시뮬레이션은 물론이고 정책 시행 이전에 설문조사나, 버스 이용객들에 대한 상담·면담을 통해 그 수요를 파악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기본적인 의견 수렴 작업도 거치지 않다보니, 노선 표지판 배치도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서울시는 "이용승객수가 많아 정류소 체류시간이 많은 버스 노선을 전방 배치해, 체류 시간이 적은 노선들은 후방에서 승하차 시행 후 바로 진출하도록 배치"했다고 밝혔다.
승객 수만을 단순 비교해 버스 노선을 주먹구구식으로 배치하다 보니, 일부 시민들은 온라인 상에서 '노선이 비슷한 버스들을 떨어트려 놓으니 너무 불편하다' 등의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설문조사나 시뮬레이션과 같은 기초 작업이라도 했다면 '대란'을 막았을 것이라는 지적에도, 서울시는 "교통변화 예측은 현장여건, 시기, 시간 등 변수가 많아 정확한 예측이 어려운 부분"이라고 해명했다.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 임규호 의원은 "교통 정책이 바뀌면 상황, 여건, 시간 등에 따른 현장 변화가 매우 커 사전 계획 수립 단계가 매우 중요하다"면서 "그럼에도 철저한 현장점검이나 시뮬레이션 없이 데이터적인 요소들만을 점검해 표지판 제도를 시행한 것은 그야말로 탁상행정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임 의원은 "지금이라도 철저한 시뮬레이션을 시행해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