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사법농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으로 4년 11개월에 걸친 마라톤 재판 끝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법원의 판단 근거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혐의 전부에 대한 예상치 못한 '통 무죄' 여파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47개에 달하는 범죄 혐의를 적용한 검찰은 유죄 입증을 자신했지만, 체면을 제대로 구겼다. 반면 2019년 5월 29일 첫 공판에서 "검찰은 공소장으로 한 편의 소설을 썼다. 그러나 용을 그리려다 뱀도 그리지 못했다"며 날을 세운 양 전 대법원장은 비록 1심이지만, 반격에 성공했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 부장판사)는 전날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도 전부 무죄 판단을 받았다. 이들은 양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장을 지냈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된 죄명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를 비롯해 공무상비밀누설,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직무유기, 위계공무집행방해, 공전자기록위작 및 행사,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이다.
이처럼 수많은 혐의에도 전부 무죄가 선고된 근거는 '직권남용' 혐의를 엄격히 적용한 이유로 풀이된다. 직권남용죄는 형법 제123조에 규정돼 있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면 처벌받는다.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린다.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등에게 적용된 혐의를 놓고 △남용할 직권이 존재하는지 △이를 실제 행사했는지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따졌다.
그 결과 검찰의 공소사실 모두에 대해 "범죄의 증명이 없다"라고 판단했다. 양 전 대법원장에게 공모를 인정하기 어렵다거나 개입했다고 볼 수 없다는 취지다.
연합뉴스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해 사건의 주심 대법관에게 행정처 입장을 전달해 재판에 개입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장은 재판에 개입할 직권이 없고, 설령 직권을 행사했다고 보더라도 이를 남용했다고 할 수 없다"고 봤다. 직권 없이는 남용도 없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심지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대법원 관계자들이 일부 재판에 개입을 시도하는 등 권한을 남용한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직 대법관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헌법재판소 파견 판사를 통해 헌재의 내부 정보를 수집하게 한 혐의도 직권남용으로 봤다. 검찰은 대법원이 헌재를 상대로 위상을 강화할 목적으로 시도했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이 이를 지시했거나 가담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가 양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판결을 둘러싼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물론 법원을 향한 '제식구 감싸기'라는 비판도 이어질 듯하다.
사법농단 의혹을 촉발한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거래 등 사법농단 의혹 1심 판결에서 무죄를 받자, 페이스북에 "정확한 건 판결문을 읽어보고 말해야겠다"면서도 "재판개입 사실은 인정된다면서 무죄라면, 재판거래 피해자들(강제징용 피해자, KTX 승무원, 세월호 가족들과 언론인 등)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면서 "양승태 대법원장 수족들은 귀신의 지시를 받은 것이냐'고 꼬집었다.
시민단체 참여연대 또한 논평을 내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47개 혐의에 대한 1심 무죄 선고는 법원의 제식구 감싸기 판결의 최정점으로 사법 역사에 수치로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