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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말더듬' 흉내…'금도(襟度)'를 벗어났다[워싱턴 현장]

미국/중남미

    트럼프의 '말더듬' 흉내…'금도(襟度)'를 벗어났다[워싱턴 현장]

    유세 중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연합뉴스 유세 중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연합뉴스 
    한국에서도 총선에 나선 후보가 지역색을 강조·비하하거나 상대 후보의 선천적인 약점을 비꼰다면 도리어 뭇매를 맞는다. 자신의 선거구 뿐 아니라 자칫 전체 선거판을 뒤흔들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소위 정치 '금도(襟度)'를 벗어난 행동이기 때문이다.
     
    '금도를 넘었다'는 표현을 많이 써서 그런지 '금도(禁道)'로 오해할 수 있지만, '옷깃 금(襟)'과 '정도 도(度)'를 합친 '금도(襟度)'가 옳은 표현이다.
     
    이 '옷깃의 품'이라는 게 결국 사람의 가슴 넓이, 그러니까 포용력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결국 금도를 벗어난 행위란 일반 사람이 품어낼 수 있는 정도를 훌쩍 초과했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올 미국 대선은 일찌감치 바이든·트럼프 전·현직 대통령 간의 '리턴매치'로 확정되면서 양 후보는 벌써부터 서로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7일 '대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던 임기 내 마지막 국정연설에서 "증오, 분노, 복수, 보복은 가장 낡은 생각들이며 이런 생각을 갖고서는 미국의 미래를 이끌 수 없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두고 "되살아난 시신처럼 보인다"고 되받아쳤다. '고령리스크'를 빗댄 것으로 보인다.
     
    '재대결'을 앞둔 전·현직 간의 험악한 말싸움이 오갔지만 이 정도로는 '금도'를 벗어났다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난 9일 조지아주에서 있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유세 발언은 차원이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시 유세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말더듬'을 조롱했다. 비단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공화당 대선 후보의 신분이기에 트럼프의 발언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또한 상대 후보의 약점을 공격하려 한 행위였지만, 같은 증세로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모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표를 얻기 위해 시쳇말로 '영혼까지 팔아야한다'는 대선 후보가 정작 표 떨어져 나가는 소리를 한 순간이었다.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의 최근 국정연설을 언급하며 "바이든이 국가를 하나로 모으겠다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며 "나는 하나로 모아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말을 더듬었고, 청중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국정연설에서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꺼내면서, 마치 바이든이 한 것처럼 '말더듬' 흉내를 낸 것이다.
     
    즉각 "유머라는 가면 뒤에 숨은 추악한 조롱이 선을 넘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최악의 부분은 바이든 대통령의 말더듬을 조롱하면서 청중의 환호를 유도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이제는 '말더듬'을 보고 비웃고 조롱해도 괜찮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말더듬'은 음절이나 단어가 반복되거나 길어져서 말이 유창하게 들리지 않는 일종의 의사소통 장애이다. 전 세계에 말을 더듬는 사람은 7천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전적 요인이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있다.
     
    영화 '킹스 스피치'로 유명한 영국 왕 조지 6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미국 기업가 잭 웰치 전 GE회장도 말을 더듬었다.
     
    일반 사람들은 말을 더듬는 사람에 대해 "불안하거나 겁이 많거나 심지어 멍청하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아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오판한 또 한가지는 그동안 '말더듬'에 대해 바이든 전 대통령이 보여준 공감능력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공감력 부족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늘상 지적받는 부분이어서 더욱 그렇다.
     
    바이든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말을 더듬었다. 학창시절 별명이 '브-브-브 바이든'이었다.
     
    이를 고치기 위해 바이든은 밤마다 손전등을 들고 예이츠의 시를 운율을 살려 암송하기도 했고, 심지어 입에 자갈을 넣고 집밖에서 벽을 보고 큰 소리로 책을 읽기도 했다.
     
    그는 추후 "말더듬 때문에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얻게 됐다"며 "모든 사람은 극복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 있고 때로는 숨기려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016년 미국 말더듬 연구소(American Institute for Stuttering)에서 연설을 통해 어렸을 때 말더듬으로 인해 느꼈던 수치심을 공유하면서도 이로인해 자신의 관점을 넓힐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다.
     
    때아닌 '2020년 바이든 영상'도 다시 사람들에게 회자되기 시작됐다.
     
    영상에는 2020년 한 행사장에서 만난 말더듬이 소년 브래이든에게 바이든 대통령이 해준 말이 담겼다.
     
    브래이든은 말더듬을 극복한 바이든 대통령이 어떻게 연설하는지를 직접 보기 위해 행사장을 찾았던 것이었다.
     
    바이든은 브래이든에게 "내가 예전에 '말더듬'을 고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으니 전화번호를 달라"며 "많은 연습이 필요하지만 확실히 이건 고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브래이든에게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절대 정의 내리지 말라"며 "아이들이 너를 놀려도 너는 잘생겼고 똑똑하고 착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도 예전에 말을 더듬었다며 즉석에서 말을 더듬으며 얘기를 이어갔고, 브래이든을 꼭 안아줬다.
     
    트럼프의 조롱이 결국 뜻하지 않게 바이든의 '바이럴'로 이어져 버린 것이다.
     
    2024년 오늘은, 남을 놀려서 이기는 능력보다 지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한 시대 아닐까.
     
    긴긴 대선 여정이 남아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바이든 흉내'는 본전은커녕 스스로를 욕바가지로 낙인찍은 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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