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환 기자'의대 증원'을 둘러싸고 출구 없이 '치킨 게임'을 벌이던 의정 갈등이 4·10 총선을 앞두고 숨 고르기에 나선 모양새다. 하지만 의료계 일각에서는 이러한 조짐에 반발하고 있어 갈등의 불씨가 언제 화약고로 번질까 우려된다.
'의료대란' 초기부터 정부와 의료계는 줄곧 날 선 발언을 주고받으며 강 대 강 대치로 일관했다. 지난 2월만 해도 조 장관은 전공의 집단행동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강경대응이 아니라 원칙대응"이라며 "이번에는 잘못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2천명 의대 증원'을 두고도 "의료 수급 전망과 대학 수요조사를 토대로 결정된 최소 숫자로, 협상을 하기 위해 정부가 던진 숫자는 아니다"며 증원 규모가 협상 대상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의료계 역시 강경 대응으로 맞서왔다. 특히 의협 회장을 뽑는 선거에서 후보자들은 '자신만이 정부와 맞설 수 있다'며 선명성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9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해보면, '의료 대란' 이후 계속된 정부와 의료계간 날선 발언들은 총선이 다가오면서 다소 누그러지는 분위기다.
우선 정부는 그동안 고집했던 '2천 명 의대 증원'을 두고 필요성은 강조하면서도, '열려있다'는 입장에 한층 더 무게를 싣고 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황진환 기자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전날인 8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회의 모두발언에서 "의대정원 2천 명 증원은 과학적 연구에 근거해 꼼꼼히 검토하고,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통해 도출한 규모"라고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다만 조 장관은 의료계와 대화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강조했다. 조 장관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의료계와 대화하고 설득하겠다"며 "과학적 근거와 논리를 바탕으로 더 합리적이고 통일된 대안을 제시한다면 정부는 열린 자세로 논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복지부 박민수 2차관도 의료계에서 제기되는 '증원 축소' 주장에 대해서도 불가능하지 않다며 대화 여지를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박 차관은 "학교별 배정을 (이미) 발표해서 (다시) 되돌리면 또 다른 혼란이 예상된다. (증원을 축소·철회하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임이 틀림없다"면서도 "신입생 모집요강이 최종적으로 정해지기 전까지는 물리적으로 변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압수수색·수차례 소환, 의협 수사 경찰…전공의 앞서 숨고르기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장과 박명하 의협 비대위 조직강화위원장. 황진환 기자의료계를 향한 경찰의 수사도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경찰은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방침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을 교사하거나 방조한 혐의로 의협 전·현직 간부들을 수사 중이다. 경찰은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박명하 조직위원장 등 간부들을 수차례 불러 조사하고 압수수색 했다.
이같이 의협 전·현직 간부들에 대해 고강도 수사를 벌이던 경찰은 정작 '업무방해 혐의'를 받아야 할 전공의 수사 앞에서 멈춰섰다.
조지호 서울청장은 이날까지도 복지부가 전공의들을 대상으로 고발에 나서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전공의에 대한 복지부의 고발 여부는 (미리) 알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현재로서 무슨 가능성을 두고 수사를 진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또 "(전공의 인지 수사 등 경찰이 먼저 수사를 개시할) 가능성은 현재로서 없다"며 경찰이 선제적으로 수사에 나설 계획은 없다고 덧붙였다.
정부도 의료계에서 최악의 상황으로 우려하는 '전공의 처벌'을 눈앞에 남겨둔 채 수사의 칼끝을 잠시 거두고 향후 대화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해석된다.
"총선 후 의료계 합동 기자회견" 의료계도 대화의 여지 열어
브리핑 입장한 김성근 의협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 연합뉴스이에 앞서 의료계도 한 발짝 물러서며 정부와 타협할 여지를 만들고 있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비공개 회의를 마치고, 총선 이후 각종 의사 단체들이 합동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던 의대 교수와 의협, 전공의 등이 이번 사태 들어 처음으로 한 목소리를 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의협은 '2천 명 의대 증원'에 고집하지 않겠다고 한 한덕수 국무총리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의협 비대위 김성근 홍보위원장은 "한덕수 총리가 (증원') '2천명'에 고집하지 않겠다고 했다. (정부가) 행동을 보여준다면 전공의들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구나'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며 "진정성 있는 모습은 2천명 증원에 대한 프로세스를 멈추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4일 윤석열 대통령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의 면담에 대해서도 "만남은 의미 있었다고 평가한다"며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이처럼 극한 대립으로 이어지던 정부와 의료계에서 최근 다소 누그러진 발언이 나오는 데에는 '총선 이후'를 기다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의정 양측 모두 총선 결과에 따라 현재의 대립국면이 요동칠 수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운신의 폭을 미리 넓혀두기 위한 전초작업을 벌인 셈이다.
"합동회견 합의한 적 없어…의협 비대위 내려와라" 의료계 일각선 반발도
연합뉴스다만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의료계 일각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아직 의료계가 통일된 목소리를 내놓지 않은 채 각개전투를 벌이면서 대화의 조짐에 반발하는 모습도 보인다.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8일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이 곧바로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는 공문을 보내며 대립각을 세웠다.
회장직 인수위는 공문에서 "의도와는 달리 비대위 운영 과정에서 당선인의 뜻과 배치되는 의사 결정과 대외 의견 표명이 여러 차례 이뤄졌고, 이로 인한 극심한 내외의 혼선이 발생했다"고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이는 최근 의정 대화가 추진되는 분위기에 제동을 걸며 기존의 강경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동안 임 당선인은 증원 여부를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비대위 등의 주장에 반대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오히려 의대 정원을 500명에서 1천 명 가량 줄여야 저출생 등 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대전협 박 비대위원장이 전격 회담을 갖자 자신의 SNS에 '내부의 적'(A few enemies inside)라고 적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기도 했다.
이에 대해 대전협 박 비대위원장도 8일 자신의 SNS를 통해 임 당선인의 SNS 내용을 담은 기사를 공유하며 기존의 강경 입장을 재확인하고 나섰다. 박 비대위원장은 해당 게시물에서 "합동 브리핑 진행 합의한 적은 없다"고 잘라 말하고, 9일 윤 대통령과 다시 만날 것이라는 관측에 대해서도 "대통령 안 만난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이처럼 의료계 내부에서 강경파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잠시 누그러들 듯 하는 의정 갈등이 과연 대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해 보인다. 비록 의료계 전반에서 의정 대화를 요구하더라도 의료계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대화 테이블을 구성하는 일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임 당선인이 당장 의협 비대위원장에 오를 경우, 합동 기자회견의 구심점 역할을 자임해온 의협 비대위가 이탈하면서 의정 대화의 조짐이 '말짱 도루묵'에 그칠 가능성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