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2024 서울국제도서전 기자간담회'에서 윤철호(맨 왼쪽) 출협 회장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어릴 적 한 번 즈음 읽었을 '걸리버 여행기'는 1726년 영국의 작가이자 성직자인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풍자 소설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에 영감을 준 하늘을 나는 섬 이야기인 '라퓨타'와 말들의 나라 '후이늠'은 이 소설의 3부와 4부를 구성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신비한 소인국과 거인국 이야기를 다룬 판타지 모험 동화로 익숙한 것과 달리 18세기 영국에 대한 실랄한 정치 비판을 담은 소설로 주목을 받았다.
오는 26일부터 닷새간 서울 강남구 코엑스 전시관(3층 C·D관)에서 열리는 2024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는, 이성적으로 완벽한 세상으로 묘사되는 '걸리버 여행기' 속 '후이늠'이다. '세계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주제도서 '걸리버 유람기'를 쓴 소설가 김연수는 19일 서울 종로구 삼청로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기자간담회를 통해 "탐욕스러운 정치와 야망에 사로잡힌 인간 사회에 절망한 스위프트가 비판한 300년 전의 세상과 오늘이 다르지 않다는 이해가 있었다"며 "그런 절망 속에서도 인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오늘의 시각으로 책을 다시 쓰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로 '걸리버 여행기'를 번안한 이는 육당 최남선(1890~1957)이다. 1908년 잡지 '소년'에 2부 거인국 편인 '거인국 표류기'를 처음 발표한 뒤 1909년 소인국과 거인국 두 편이 수록된 '걸리버 유람기'를 펴냈다. 원작의 수도를 '서울'로, 군사들이 훈련을 받는 곳을 '훈련원'으로 표기하는가 하면 원작의 문어체는 이야기꾼이 술술 풀어 말하듯 우리식 표현과 '입말체'로 풀어쓴 것이 특징이다.
주제도서로 출간된 김연수 작가의 '걸리버 유람기'는 1~4부를 실으면서 소인국과 거인국 편은 최남선의 번안본을 맞춤법·표기법만 현대에 맞게 다듬고 그대로 실었다. 3부(라퓨타)와 4부(후이늠)는 2024년 오늘의 현실에 맞게 번역·번안 하되 최남선이 당시 구한말의 현실 세계에 어우러지게 번안 방식을 따랐다. 그래서 주제어이기도 한 '후이늠' 편에는 유럽의 저편에 있던 조선의 허균이 그린 이상 세계이자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 등장한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 주제 포스터. 출협 제공 김연수 작가는 "3부에는 라퓨타를 방문하고 일본 에도를 거쳐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상선을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는 걸리버의 여정이 나오는데, 유럽의 판본 중에는 네덜란드 상선이 지나는 바다를 '씨 오브 코리아(Sea of Korea)'로 표시한 책도 있다"며 "홍길동전의 이상 사회를 꿈꾸는 홍길동과 걸리버가 만난다면, 걸리버가 다녀온 '후이늠'을 새롭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300년 전 18세기와 최남선의 19세기 구한말, 21세기인 2024년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가 당면한 인류의 문제를 고전이라는 문학을 통해 절망에서 '다시 쓰는' 희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다시 쓰는' 이상의 세계 '후이늠'을 주제로 한 서울국제도서전은 2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막해 30일까지 닷새간 열린다.
해외에서 18개국 122개 출판사와 출판 관련 단체가 참가하고, 국내 350여개 출판사가 참여해 도서 전시와 강연, 사인회, 세미나, 마켓, 현장 이벤트 등 450여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올해 주빈국은 1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사우디아라비아다. 올해 한국과 수교 50주년을 맞은 오만, 수교 65주년을 맞은 노르웨이가 '스포트라이트 컨트리'로 참여한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부문(2019)을 수상한 조카 알하르티를 비롯해 미셀 자우너, 데니스 뇌르마르크 등 유명 작가들이 도서전을 찾는다.
19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2024 서울국제도서전 기자간담회'에서 주진우 서울국제도서전 대표가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후이늠'을 주제로 다양한 시각에서 세상을 탐구하고 통찰해 볼 수 있는 강연 및 전시 프로그램이 5일간 준비돼 있다.
도서전 첫날인 26일에는 김연수 소설가의 입말로 다시 쓰고 강혜숙 작가의 그림을 더해 새롭게 출간한 '걸리버 유람기'를 처음 선보이고 이 책의 의미와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할 예정이다.
시인 김혜순·박형준·안희연·정호승·진은영의 시 15편과 소설가 강화길·구병모·이승우·임솔아·장강명·천운영·편혜영의 단편소설 7편, 남서연·조윤서·하선우 작가의 일러스트 9점이 담긴 책 '후이늠: 검은 인화지에 남긴 흰 그림자'도 이번 도서전의 또다른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올해 공식 포스터에는 걸리버와 함께 돌고래가 등장한다. 2013년 제주 바다에 방사된 남방큰돌고래 '제돌이'를 형상화했다.
'제돌이'는 우리에게 동물과 자연도 법적 권리를 지닌 법인격이 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는 상징적인 존재로 최근 주목받으면서 이번 도서전에 그 의미를 다룬다. 29일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도서전에서 이에 대한 강연을 진행한다.
27일에는 'H마트에서 울다'의 저자 미셸 자우너(밴드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리드보컬)가 참여하는 '기억으로 이어지는 레시피' 강연이, 팔레스타인 분쟁 연구자 정환빈, 김민관 기자, 평화갈등연구소 정주진 소장이 '평화의 화살표는 어디로 향하는가'를 주제로 인간의 폭력성과 갈등을 살펴보고 평화의 방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미나도 진행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아트북과 독립출판물을 제작하는 출판사와 서점을 별도로 만나볼 수 있는 '책마을' 전시 공간이 마련된다. 올해 책마을에는 총 86개의 독립 출판사가 참여하며 국내 출판사 외에도 대만의 서점·독립출판사가 참여하는 등 작년 보다 규모가 커질 전망이다.
19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열린 '2024 서울국제도서전 기자간담회'에서 윤철호 출협 회장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민수 기자
올해 도서전은 정부 지원 없이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단독으로 진행한다. 도서전 보조금 성격을 두고 문화체육관광부와 갈등을 빚으면서 도서전 지원이 사실상 중단됐다. 이에 따라 기부금과 회비, 참가비 등 출협 자체 비용으로만 치러진다.
윤철호 출협 회장은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정부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제대로 개최할 수 있을까 하는 일부의 우려도 있었지만 참여도 높고 준비하는 입장에서 진행도 순조로운 상황이다. 창조하는 주체들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출협은 올해 주요 인사 방문을 위해 유인촌 문체부 장관에게 도서전 초청장을 보냈으나 '국외 일정으로 참가하기 어렵다'는 회신을 잠정 받은 상태라고 밝혔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 입장을 위한 티켓은 25일까지 온라인을 통해 약 30% 할인가로 판매된다. 서울국제도서전 전체 강연 및 기획 프로그램은 도서전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