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다음 달 정부 세법개정안이 발표될 예정인 가운데, 저평가된 기업 주식 가치를 끌어올리는 '밸류업'을 위한 사실상 정부 감세안의 밑그림이 공개됐다.
결국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자'는 '부자 감세'라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실제 세제 변화로 이어질까 주목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지난 24일 개최한 '밸류업 세제지원 공청회'에서 밸류업 기업에 대한 정부의 세제 지원 대책 방향을 논의했다.
앞서 정부가 기업의 '밸류업'(저평가 기업의 주식 가치 제고)을 지원하기 위한 세법·상법 개정 작업에 앞서 여론을 수렴하겠다고 밝히면서 2차례의 토론회가 마련됐다. 다만 1차 세제 토론회의 주체가 공공기관이 아닌 한국경영자총협회로, 참석자도 과도하게 친(親)기업 인사로 편향됐다는 지적이 제기돼 다시 이번 공청회가 마련됐다.
정부가 세법개정안 발표를 한 달 여 앞둔 상태에서 국책연구기관이 직접 마련한 공청회인만큼, 밸류업 세제 개편에 대한 정부의 의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자리다.
이전 1차 토론회 당시에는 현행 1억 원 이하에서 시작하는 상속세 과세표준 구간을 15억 원 이하로 대폭 높여잡아서, 최고세율 적용 구간 기준도 30억 원 초과에서 100억 원 초과로 바꾸고 최고세율도 50%에서 10%p 낮춰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이에 비해 이날 공청회에서 상속세 분야 발제를 맡은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심충진 교수는 과세표준 구간 자체는 3배 완화하는 대신, 최고세율을 30%로 낮추는 방안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상속세율을 현행 10~50%에서 6~30%로 낮추거나, 과세표준을 1억 이하~30억 초과에서 3억 이하~90억 초과로 완화하거나, 둘 다 적용하자는 내용이다.
또 최대주주 할증 평가는 폐지하되 최고 상속세율을 30%로 조정할 경우 단기적으로 5~10%로 축소하는 대안도 함께 제시했다. 가업상속공제 대상을 매출액 기준 5천억 원에서 1조 원 이하로 완화하고, 공제한도도 1천억 원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내놓았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심 교수는 상속세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 가치가 클수록 상속세 부담도 크니 세금을 피하려 기업 가치를 낮추거나 폐업까지 할 수 있기 때문에 투자와 고용을 이끌기 위한 촉진세로서 상속세를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앞서 대통령실 성태윤 정책실장이 "OECD 평균은 약 26.1% 내외로 추산되기 때문에 최대 30% 내외까지 인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시한 바와 일맥상통한 내용이다. 결국 상속세 최고세율 조정을 필두로 한 일련의 감세안이 사실상 정부의 상속세 개편방향으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연합뉴스하지만 전문가들은 '밸류업'을 위한 전격적인 감세 방안이 자칫 다른 부작용을 부를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당장 이날 법인·소득세에 대해 발제한 조세연 홍병진 부연구위원은 주주환원을 달성한 법인과 소액주주를 위한 다양한 세제지원책을 소개하면서도 "기업은 수익 창출과 가치 증대에 힘쓰고, 투자자는 적극적 행동과 합리적 투자선택을 실행하는 것만이 중장기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조세 지원은 초기 정착과 행동 유도를 위한 보조적 수단이기에 단기적 촉진 수단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특히 역대급 세수 펑크를 겪었던 지난해보다 더 세수입이 줄어든 상황에서 연이은 '부자 감세' 정책을 뒷받침할 대안이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한국공학대학교 복지행정학과 신승근 교수는 "지방 공무원들의 월급조차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로 세금이 부족한 상황인데 세금을 깎아주자는 논의가 어떻게 가능하겠느냐"며 "세금의 첫째 목표는 결국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를 운영하기 위해 거두는데,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서 다른 정책적 목표를 논의할 때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부자들의 세금을 깎으면 그 대안은 국가 부채를 늘려야 하는데, 정부는 건전 재정을 강조하고 있어 부채를 늘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라며 "결국 부자에게 감세한만큼 중산층, 서민에게서 증세하거나 후세에 부담을 지우겠다는 얘기"라고 주장했다.
또 "결국 상속세는 개인이 낼 뿐, 기업의 가치와 직결되지 않는다. 경영진이 주식을 팔아서 상속세를 내더라도 주주의 구성이 바뀌는 것이지, 기업의 가치 제고와는 큰 관련이 없다"며 기업 밸류업을 통해 법인세 등을 더 거둘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대표적인 '부자 세금'인 상속세를 다양한 소득 누락에 대한 보완세이자 부의 무상이전을 방지하고 불로소득에 대해 과세하는 소득재분배 기능 대신, 부의 재창출을 위한 촉진세로 이해해야 한다는 심 교수의 주장에도 반론이 나온다.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정세은 교수는 "겉으로는 상속세 법정세율이 높아 보이지만, 실제 전체 상속 건수의 약 4.5%의 소수만이 상속세를 납부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체류세율이 10% 이상이어서 상속세는 아주 극소수의 부자들에게만 걷히는 세금"이라며 "부의 대물림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국세청의 총 상속재산 가액 규모별 상속세 신고 현황을 보면 상속세 과표구간상 최고세율 50% 적용 대상인 30억 원 초과 재산을 상속받은 신고자는 2983명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국민의 0.005% 초(超)부자들만을 위한 세금인 셈이다.
이어 정 교수는 "세수 위축 뿐 아니라 부의 대물림이라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킬 안"이라며 "야당에서 나서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이를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물론 여소야대 국면에서 정부안이 그대로 통과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진성준 정책위의장이 지난 18일 "세수 결손이 심각하고 재정 상태가 엉망인데 여기에 또 감세를 꺼내 들고 있다"면서 '재정 파탄청문회'를 열겠다며 감세 논의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정부가 내놓을 세법개정안을 살펴본 후 구체적인 입장을 확정할 계획이다.
다만 민주당은 총선 직후 제 손으로 펼쳐놓은 '부자감세' 논란에서 갈팡질팡할 뿐, 확실한 입장을 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재정 청문회'로 입장이 정리됐다지만, 그 전후로 박찬대 원내대표가 "금투세·종부세·상속세에 대한 검토는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반복하기도 했다.
결국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야당의 묵인 아래 상속세 등 '부자 감세'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현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가 나온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권오인 경제정책팀장은 "과거 더불어민주당은 경제민주화 등을 중요시했는데, 이번 22대 총선 공약만 봐도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이 거의 없다"며 "이미 윤석열 정부가 입권 초기 내놓은 조세 완화 정책을 다 통과시켜줬다"고 짚었다.
이어 "종부세 폐지, SOC 개발 공약 등을 보면 여당만큼 친재벌화된 정책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며 "야당이 본연의 정책 목표 없이 여당을 견제하지 않고 동조하는 것 자체가 국민들에게 안타까울 일"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