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일부 구간을 폭파한 가운데 15일 오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 류영주 기자남북이 일촉즉발의 충돌 위기로 치닫는 가운데 유엔군사령부의 정전협정 관리 역할이 더없이 중요해졌다. 남북 간 적대감이 전례 없이 커지고 최소한의 연락채널마저 끊긴 가운데 예전처럼 미국이나 중국의 중재도 기대하기 어려워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남북은 북한의 평양 무인기 침투 사건을 공개한 지 나흘째인 15일에도 비난 성명 등을 주고받으며 벼랑 끝 전술로 일관했다. 특히 이날 정오쯤에는 북한이 경의‧동해선 남북 연결부를 폭파하고 우리 군은 대응사격에 나서며 긴장감을 더욱 높였다.
남북은 이미 '화력대기태세 강화'와 '작전예비지시'를 각각 전방부대에 하달하며 사실상 비상 상황에 돌입했다. 북한은 유사시 수도권을 장사정포 등으로 급습할 8개 포병여단을 지난 13일 완전무장 시켜 사격대기태세로 전환했다.
우리 국방부도 이날 북한의 '적반하장 행태'를 비난하며 "우리 국민 안전에 위해를 가한다면 그 날이 바로 북한 정권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맞불을 놨다. 기존에 '북한 핵 사용시' 등을 전제로 '정권 종말'을 경고했던 것에 비하면 일전불사의 문턱이 크게 낮아졌다.
이런 가운데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의 담화가 나흘 연속 발표된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15일 담화의 경우는 단 두 줄짜리 짧은 문장으로 '한국 군부 깡패'들이 무인기 사건의 '주범'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한 뒤 혹독한 대가를 예고했다.
한국 군부가 무인기 사건 주범임을 명백히 알고 있다고 한 전날 담화와 비교하면 '증거'라는 표현이 추가됐다. 전날 담화에서 미국 책임론을 강변했던 것에서 한국 군부로 초점을 집중한 것도 다르다.
북한이 상황을 극적 반전시킬 '증거'를 갖고 있을지는 회의적이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주도권을 쥐려할 것임은 틀림없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우리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자 자신들도 모호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진실공방으로 번져 계속 이슈화 시킬 수 있는 소재로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한 치 양보 없는 팽팽한 대치국면에서 유엔사는 무인기와 경의‧동해선 폭파에 대한 정전협정 위반 여부 조사에 착수했다. 유엔사는 지난 14일 "이 문제(평양 무인기 사건)를 정전협정을 엄격히 준수하며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 지난 9일 남측과의 연결 도로‧철도 완전차단 등을 발표하며 미군(유엔사) 측에 전화통지문 발송 사실을 공개한 것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유엔사는 북한의 경의‧동해선 폭파에 대해서도 조사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군 관계자는 15일 "북한의 DMZ(비무장지대)와 MDL(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각종 공사 행위와 무단 시설물 설치 등은 모두 정전협정 위반"이라며 "유엔사에 의견을 냈고, 현재 유엔사에서 검토 중으로 조만간 입장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북한이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일부 구간을 폭파한 15일 오후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차량이 임진강을 건너고 있다. 연합뉴스유엔사 조사는 남북 군사적 긴장이 위험수위에 달한 가운데 그 자체 만으로도 진정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이 유엔사 군사정전위 조사에 협조할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긴장 완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기대된다.
그러나 유엔사 조사는 과거 전례에 비춰 한계도 분명하다. 유엔사는 지난 6월에도 북한의 MDL 침범과 우리 측의 대북 확성기방송에 대해 조사를 벌였지만, 이후 지금까지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유엔사는 북한의 DMZ 내 대전차 방벽 건설과 지뢰 매설에 대한 조사에서도 군사력 증강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유엔사는 당시 "북한군은 DMZ 내 북측 지역의 민사행정을 감독하고 있고, 비록 (그 지역 내) 벌목과 건설 활동에 대해 사전 고지하는 게 분별 있는 행동이지만, 정전협정에 의해 의무화되어 있지는 않다"고 결론 내렸다.
다만 유엔사가 이번에 남북 양측에 어떤 결론을 내린다 하더라도 조사 착수를 통해 현상 동결의 계기를 마련할 여지는 기대해볼 수 있다.
한편 16일 방한하는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우리 측에 어떤 입장을 전달할지도 주목된다. 11월 대선을 앞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으로선 정권 재창출을 위해 국제정세의 안정적 관리가 중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