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3일 밤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경내로 진입하려는 계엄군과 저지하려는 시민 및 국회 관계자들이 대치하고 있다. 박종민 기자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밤 선포한 비상계엄이 국회에 의해 155분 만에 무산된 가운데
의료계에서는 계엄사령부 포고령에 담긴 '이탈 전공의 등의 48시간 내 업무 복귀' 조항 관련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국가 정상화'를 명분 삼아 사직 전공의를 상대로 동원령을 내린 것은 최근 좌초된 여·야·의·정 협의체 재개를 기약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최악의 한 수'였다는 평가다. 수능성적 발표를 앞둔 지금도 평행선인 의대정원 문제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한 상태를 고려했다면 이번 사태가 가능했겠냐는 분노도 크다.
정부로서 더 뼈아픈 대목은 꼬박 10개월을 끌어온 '의료개혁'의 정당성이 치명상을 입었다는 점이다. 그간 환자단체들은 "시간은 곧 목숨"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의료계와 타협점을 찾아줄 것을 호소해 왔다. "국민 생명과 건강을 위해" 필수·지역의료를 차질 없이 확충하겠다는 것은 정부가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 때마다 상용구처럼 반복해온 표현이었다.
5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보건복지부 수련환경평가위원회는 전날부터 내년 3월 임상수련을 시작할 전공의 6950명을 모집한다고 공고했다. 유형별로 각각 인턴 3356명, 레지던트 1년차 3594명 등이다.
당초 정부는 지역의료에 힘을 더 실어주고자 수도권 대 비수도권 전공의 정원을 올해 5.5 대 4.5에서 내년 5 대 5로 변경할 계획이었으나, 전공의 유인 차원에서 5.5 대 5로 조정하기로 했다.
한 자리라도 더 돌아올 여지를 남겨놓겠다는 의도였지만, 한밤 초유의 계엄이 선포되면서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지적이 나온다. 원서 접수는 오는 9일까지 진행되지만 의료계에서는
지원할 전공의들이 거의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의료인들은 이번 사태에서 전공의를 콕 집어 현장 복귀를 명한 것 자체가 '다분히 의도된 표현'이라는 입장이다. 올 2월 '의대 2천 명 증원'을 발표할 때부터 의사들을 '반(反)개혁세력'으로 보며 적대시해온 프레임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또한
90%가 이미 사직을 매듭지은 전공의들에게 예전 병원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하는 것 역시 초법적 발상이라는 지적이다.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대학병원 교수 A씨)이라거나 "(계엄령에 전공의가) 언급된 것 자체가 어색하다"(개원의 B씨) 등의 반응이 나온 이유다.
앞서 계엄사령부는 지난 3일 밤 11시를 기해 발령된 제1호 포고령에서 "전공의를 비롯하여 파업 중이거나 의료현장을 이탈한 모든 의료인은 48시간 내 본업에 복귀하여 충실히 근무하고 위반 시는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고 밝혔다.
3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 병원에 전공의 전용공간이라고 쓰인 안내판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이처럼, 죄과가 있다고 보고 처치하거나 처분한다는 의미의 '처단(處斷)'이 쓰인 것도 의사들을 격앙시켰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와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는 전날 공동성명을 내고 "윤석열은 국민에 대한 탄압을 당장 멈추고 하야하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가장 먼저
윤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대통령으로서의 기본적 의무를 저버렸다"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전공의 관련 포고령에 대해 "기본적인 팩트조차 왜곡했다"며 "사직 전공의들이 아직도 '파업 중'이란 착각 속에 미복귀할 경우 처단하겠다는, 전시상황에서도 언급할 수 없는 망발을 내뱉으며 의료계를 반(反)국가 세력으로 호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수들은
전공의도 국민의 한 사람임을 고려할 때 이는 "윤 정권이 반(反)국가 세력임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대통령이 아닌 반헌법적·반역자 세력임을 자인하는 바"라고 강조했다.
내달 치러지는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 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후보 5명도 한 목소리로 비난에 가세했다.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비상대책위원장은 "2024년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국민을 '처단한다'? 처단당해야 할 것은 이런 말을 내뱉는 자"라고 일갈했다.
의협 최안나 기획이사(전임 집행부 대변인)도
"1주일에 80시간이 넘는 격무 속에서도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전선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젊은이들을, 대통령의 '우격다짐'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가 전복을 꾀하는 내란 세력으로 간주해 '처단'하겠다는 이 나라가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던 그 자유주의 대한민국이 맞나"라고 반문했다.
현 정부가 헌정질서를 무너뜨리고 국민의 기본권을 부당하게 억누르려 했다는 데 대해선 의협 등과 반목해온 의료계 다른 직역들도 공감대를 같이하고 있다.
현 정부가 의료개혁을 원래 취지대로 완수할 수 없다고 보는 상황 인식도 대동소이하다. 의대 증원에 찬성해온 보건의료노조는 전날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국가세력으로 몰아붙이고 계엄령으로 반대세력에 재갈을 물리려는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윤 대통령을 가리켜 "내란죄를 저지른 범죄인"이라고 규정했다.
또 "국회는 윤 대통령 탄핵을 지체 없이 의결해야 한다"며 정권 퇴진 시까지 무기한 파업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간 보건노조가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의대 증원 백지화' 등의 주장을 정면 비판해온 점을 감안하면, 놀랍도록 비슷한 시각이다.
계엄령이 선포된 당일 오전까지도 의료계를 향해 '여·야·의·정 협의체에 다시 돌아오라'고 촉구했던 환자들은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본인이 식도암 환자이기도 한 중증질환연합회 김성주 대표는
"이 사태가 우리 환우들에겐 너무 황당하고, 배신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제는 완전히 끝난 것 같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