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안수 육군참모총장. 황진환 기자12.3 비상계엄 사태의 전모가 조금씩 밝혀지는 가운데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사실은 허수아비 신세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모든 상황을 진두지휘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나 중앙선관위 장악 등 별동대 역할을 한 여인형 방첩사령관 등은 뒤로 숨으면서 책임이 전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5일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박 총장은 비상계엄 발동을 둘러싼 경위에 대해 "모른다"는 답변을 거듭했다.
계엄군이 국회에 난입한 이유는 물론, 국회로 향할 것이란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화상(모니터)에 나오는 걸 보면서 국회에 경찰이 많이 (모였구나 알게됐다)"라고 했고, "그럼 모르면서 명령을 하달했느냐"는 질문에 "명령 하달할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인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기가 찬 듯 "병력 이동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내란죄가 성립하는 것"이라며 "허수아비를 데리고 현안 질의할 필요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
박 총장은 계엄령 선포도 윤석열 대통령의 긴급담화를 통해 알았고, 계엄사령관 임명도 이후 전군지휘관회의에서 이뤄졌다고 밝혔다.
급하게 포고령을 읽어본 뒤 본인 명의로 서명하고, 겨우 4명의 요원을 데리고 계엄 상황실부터 꾸리느라 상황 통제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상황실이 완성된 4일 새벽에는 이미 계엄 상황이 종료된 뒤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박 총장이 방첩사의 비밀 작전을 몰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방첩사는 지난 3일 밤 경기도 과천의 중앙선관위원회를 점거해 야간 당직자 휴대전화 등을 압수했다.
조지호 경찰청장은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여인형 방첩사령관으로부터 방첩사의 선관위 진입 계획과 경찰 협조 요청을 전달 받았다고 밝혔다.
계엄군이 선관위에 전격 투입된 배경이 총선 부정선거 강제수사를 위해서라는 설명이 나왔다. 김 전 장관은 SBS와의 인터뷰에서 "선관위 부정선거 의혹 관련 수사의 필요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방첩사령부. 연합뉴스방첩사는 또 국회에 투입된 1공수여단 등 병력 외에 별도의 체포조를 운용한 의혹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이날 국방위에서 방첩사가 국회의원 체포를 시도했다는 제보가 있다며 설명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박 총장의 답변 역시 그런 사실 자체를 처음 듣는다는 식이었다. 물론 이는 내란죄 적용에 따른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한 '모르쇠' 전략일 수 있지만 정황상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선호 국방부 차관도 이날 국방위에서 같은 맥락의 증언을 일관되게 했다. 비상계엄 선포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알았다는 게 대표적이다. 비상계엄 준비가 국방부 차관도 모를 만큼 극비리에 진행된 셈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계엄사령관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됐다는 것은 또 다른 측면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윤 대통령과 김 장관이 안 그래도 위헌‧위법한 계엄 사태에서 그나마도 비선 라인을 가동한 정황 때문이다. 방첩사의 작전은 계엄사령관을 '패싱'하고 장관 직접 지시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과 김 장관, 여 방첩사령관은 서울 충암고 선후배 관계로 이전부터 여러 의혹이 제기돼왔다. 야당은 이런 점에 주목해 계엄령 발동 가능성을 수차 경고했지만 지나친 억측으로 치부됐다.
현 상황이 더욱 고약한 것은 '얼굴마담'만 앞에 남고 실제 주동자와 핵심 세력은 뒤로 숨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윤 대통령은 하루 만에 사표를 수리한 김용현 전 장관과 달리 박 총장의 사표는 반려했다.
김 전 장관은 빠지고 박 총장만 이날 국회에 출석한 배경이다. 국회는 곽종근 특수전사령관과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 등 실제 병력 동원에 가담한 지휘관들도 출석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곽 사령관의 경우는 국회에 투입된 특전사 요원들이 테이저건(전기충격기)과 공포탄을 사용할 것을 수차례 요청한 당사자다. 박 총장의 반대로 불발되긴 했지만 자칫 심각한 유혈사태로 비화할 수 있었다.
결국 윤 대통령이 김명수 합참의장 대신 박 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앉힌 것은 특혜가 아니라 '속죄양' 삼았던 셈이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윤석열이라는 (박) 총장의 지휘자에 대해 저는 분노한다"며 "비겁하고 용렬하고,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탄식했다.
다만 일각에선 곽 사령관이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기에 큰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정확한 진상 규명을 위해서라도 국회의 추가 조사가 필요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