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상공회의소 제공미국의 고율관세 정책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 선 부산지역 수출기업들이 이번엔 중동 사태라는 또 다른 대외 악재를 만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직접적인 수출 길마저 좁아진 상황에서 국제유가와 해상운임 폭등이라는 간접 충격이 지역 제조업의 기초 체력을 통째로 흔드는 모양새다. 정부와 지자체의 적기 지원이 부재할 경우, 한계에 직면한 중소기업들의 연쇄성장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부산상공회의소가 20일 발표한 '중동사태에 따른 지역 수출기업 영향 및 대응 실태조사(주요 수출기업 500개사 대상)' 결과를 보면, 대외 리스크의 장기화가 어떻게 지역 실물경제의 '기초비용'을 파괴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겉보기로만 보면 부산의 중동 직접 수출 비중은 전체의 5.6%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글로벌 공급망의 혈류가 막히면서 발생한 유가·운임의 수직 상승이 부산 기업들의 목을 죄어오고 있다.
기업들이 호소한 가장 큰 피해는 '원자재 수급 불안과 가격 상승'(43.6%)이었다. 그 뒤를 '물류비 증가'(32.7%), '에너지 가격 상승'(13.2%)이 이었다. 원자재와 물류비는 제조업 수익성과 직결되는 핵심 비용 항목이다.
실제로 부산 지역 기업의 86.3%가 원·부자재 가격 상승을, 무려 93.1%가 물류비 증가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홍해 사태 등으로 인한 운항 스케줄 지연과 긴급 해상운임 할증료, 보험료 인상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한 '복합 비용 폭탄'이다.
부산상공회의소 제공모래시계처럼 줄어드는 원자재 재고, "3개월 뒤가 두렵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다가올 '생산 중단'의 공포다. 조사 대상 기업의 72.7%는 현재 보유한 원·부자재 재고가 '3개월 이내 수준'이라고 답했다. 중동 사태가 올여름을 넘겨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당장 가을부터는 원자재가 없어 공장을 멈추거나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다.
비축분이 바닥나 가는데도 마땅한 돌파구는 보이지 않는다. 기업들은 '신규 조달처 물색'(31.4%), '생산물량 조절'(16.6%) 등으로 버티려 하지만, 중소기업 10곳 중 약 4곳(37.7%)은 "재고 부족에 대해 별다른 대응 방안이 없다"며 손을 놓고 있는 처지다. 대기업처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동해 대체 공급망을 짤 체력이 중소기업에는 없기 때문이다.
비용 폭등과 수급 불안은 고스란히 미래 전망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부산 수출기업의 70.5%는 올해 수출 실적이 지난해보다 '감소'할 것이라고 비관했다. 개별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지정학적 리스크 앞에서 지역 기업의 40.1%는 아예 "장기화 시 아무런 대응 방안이 없다"고 답했다. 시장 다변화(39.9%)나 조업 단축(6.3%) 같은 고육지책도 한계가 명확하다.
기업들이 현장에서 가장 시급하게 요구한 정책 과제는 '긴급경영안정자금 확대'(25.2%)와 '원자재 수급지원 신속 시행'(22.3%)이었다. 당장 치솟는 운임과 자재 대금을 치를 수 있는 유동성 공급과 정부 차원의 자재 확보 프로세스가 작동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밖에 정책금융 우대금리 확대(18.6%)와 관세·물류 긴급 지원(12.5%)이 뒤를 이었다.
부산상의 조사연구팀 관계자는 "대외 지정학적 리스크가 장기화되면서 지역 기업들의 수익성이 사상 최악의 수준으로 후퇴하고 있다"며 "특히 원자재 재고가 3개월 미만인 기업이 70%를 넘은 만큼, 정부와 지자체는 단순한 금융 지원을 넘어 원자재 공급망을 안정시킬 실효성 있는 긴급 조치를 즉각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