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의 고통, 기도하는 아이들 화폭에 담아 위로[어깨동무]
▶ [어깨동무] IN 코너 : 여순사건을 그리는 화가들 ③ ① 15m 화폭에 담긴 73년 전 여순사건…"질곡의 역사, 양심이 누른 붓"
② 굴곡진 가족사에 '충격'…"여순사건 기록화, 증명된 것만 그렸다"
③ 여순사건의 고통, 기도하는 아이들 화폭에 담아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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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로 십자가에 달린 참혹한 예수의 형상. 그 아래 스카프를 두르고 고개 숙인 채 서 있는 두 여인은 양손으로 목덜미를 잡아 내리고 있다. 두 여인의 양손은 매우 거칠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상실의 고통으로 얼마나 몸부림치며 울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전남 여수 장도전시관에 걸린 이인혜 작가의 작품 '애도 - 울게 하소서Ⅰ'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고통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작가는 상실의 경험은 부정과 원망의 단계를 지나 충분히 슬퍼한 뒤에야 애도의 단계에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치유와 해원이라는 것은 충분히 슬퍼한 다음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얀 수건 위에 벌거벗은 채 홀로 엎드려 울고 있는 여인을 그린 작품 '애도 - 남은자의 상처'의 모델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이인혜 작가는 스스로가 고통스러운 상실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남편이 바로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요절한 천재 조각가'로 불리는 류인이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류인이 세상을 등진 뒤 그의 작품을 한동안 보지 못했다고 한다. 러시아 모스크바로 떠나 그림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그 이유다. 주로 인물화를 그리는 이 작가의 작품에서 풍기는 화풍,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외로움과 고독, 우울감은 바로 작가 자신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리를 삭발한 채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의 삼키고 있는 장면이 담긴 '애도 – 수용'은 상실의 고통을 지나 부정과 원망의 단계를 끝낸 이의 모습을 나타낸다.
"여수에 내려와 여순사건을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건이 발생한지 7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정쟁의 대상이 되고 있어 몹시 안타까웠어요. 그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디는 시민이 대단했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GS칼텍스 예울마루 창작스튜디오 2기 입주작가로 뽑힌 이 작가는 두 달여 동안 여수에 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작품 주제를 고르다가 여순사건을 애도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그리기로 했다.
인간에게 내재된 고독, 외로움, 불안 심리를 포착하고 대상의 심적 고뇌와 번민을 그려온 이 작가는 여순사건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시민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치유와 해원의 시작을 열고자 했다.
이인혜 展 '애도 1948, 치유와 해원의 시작'에 전시된 작품 86점 중 5점을 뺀 나머지는 81개는 장도스튜디오에서 그려졌다. 이중 66점은 시민들의 기도를 모아놓은 초상화다.
돌산에서 공방을 운영하는 부부, 한센인 정착촌인 율촌 도성마을에서 만난 페인트공, 애양청소년 오케스트라 어린이 단원들, 향토사학자, 화가, 피아니스트, 여순사건 연구자, 섬 사진작가 등 지난 두달여 동안 여수에서 지내며 만난 사람들이다.
이 작가는 "제가 해오던 작업의 주제가 애도인만큼 애도하는 시민을 그리면 많은 사람의 중보기도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가능한 많이 만나 기도 사진을 찍었다. 내 팔이 가는 한 많은 분을 그렸고 전시를 통해 위로의 의미를 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번 작품 전시는 다음달 14일까지 여수 웅천 GS칼텍스 예울마루 장도 전시실에서 펼쳐진다. 이 작가는 이번 전시가 끝나면 그림의 모델이 되어준 시민들에게 그렸던 그림을 선물할 계획이다. 이 작가는 "사실은 작업을 하면서 모델이 된 시민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그림을 그리려다보니 작품 경향이 갈수록 예뻐지고 있다"며 웃었다.
미술평론가 조은정 고려대 교수는 이인혜 작가의 이 같은 작업에 대해 "다수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만나고 대화하고, 그려진 그 대상에 작업의 결과물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행동주의의 모습을 띈다"고 평가했다.
조 교수는 "'여수시민 그리기'라는 원대한 프로젝트는 바로 억압된 역사와의 대면이자,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사실은 권력과 역사의 피해자였음을 인지하게 하는 적극적인 행위"라며 "이인혜는 애도하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반목을 넘어서는 인간성의 숭고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 교수는 "애도의 태도와 눈물은 영과 육을 정화하고 우리를 일상으로 회복시킨다. 애도 없이 앞으로만 향하였던 우리의 일상 그리고 역사 앞에서 애도하지 않았던 국가권력은 억압과 봉합으로 상처를 깊이 주름지게 했다"며 "이제 여수의 섬 장도에서 맞는 진정한 애도의 시간은 그 반목의 변곡점을 이루게 하는 자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혜 작가는 최근 여수시에 남편 류인이 남긴 작품 70여 점과 작가의 격정적 삶을 엿볼 수 있는 드로잉, 작업 노트, 작업 도구 등을 기증할 의사를 밝혔다.
'요절한 천재 조각가'로 불리는 류인은 인체의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하고 독특하게 묘사한 작품을 선보이며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간경화로 병약했던 그는 작품과 자신을 맞바꾸며 10여 년의 짦은 기간 동안 다양한 불후작을 남겨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천재적 재능을 다 펼치지 못하고 4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큰 아쉬움을 남겼다.
류인이라는 조작가를 알린 화제작 '지각의 주(1988)', '급행열차-시대의 변(1991)' 등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보는 이들에게 생(生)에 대한 인간의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하며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이인예 작가가 류인의 작품을 여수에 기증하기로 한데는 류인이 여수 돌산 평사리 출신 고 류경채 화가(1920~1995)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여수는 아버님 고향이기도 하고 결혼 후에도 남편과 함께 나이가 들면 돌산에 와 살겠다고 했던 곳"이라며 "류인도 평소 여수가 고향이라고 생각했고 여수가 가진 아름다움과 함께 작품이 설치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수시도 유족의 의사를 반영해 류인의 작품 전시 공간 마련에 나서고 있다.
여수시 문화예술과 관계자는 "류인의 유족과 여러 차례 만나 작품 전시에 대한 내용을 논의하고 있다"며 "현재 조성되고 있는 남산공원에 작품을 전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며 장기적으로 미술관 건립 등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1.10.31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