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이 한국 국적을 인정받지 못해 국내에서 10여년 째 '무국적자' 신세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아버지의 초청으로 국내로 들어왔지만 국적법의 단서조항에 걸려 귀화대상으로 분류되면서 아직 국적 취득을 못하고 있으며 추방에 대한 두려움까지 안고 살아가고 있다.
1999년 한국인 아버지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오동진(39) 씨는 아버지의 '직접인지'를 통한 국적취득을 추진하던 도중 국적법이 바뀌면서 아직까지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고 있다.
현행법은 아버지의 '직접인지'를 통한 국적 취득의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그 대상으로 미성년자로 제한하고 있으며 성년인 경우는 귀화대상자로 분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 씨는 작년까지 무려 6번이나 시험을 치렀지만 계속 떨어졌고 지난해에는 필기시험 통과 후 면접에서 떨어져 여전히 무국적 상태에서 지내고 있다.
28일 만난 오 씨는 당시 아버지가 외국에 체류하는 통에 인지 절차가 지연됐고 그 사이 법이 바뀌었다면서 "어릴 때는 한국식 이름 때문에 베트남 친구들에게서 따돌림당했고 한국에 온 뒤 '무국적자' 신세로 지내고 있다"고 한탄했다.
오 씨는 "아버지 초청으로 한국에 왔고 가족관계확인서에까지 이름이 올라 있는데 왜 내가 계속 국적을 인정받기 위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입국 직후 당시 법에 따라 한국 국적 취득을 위해 베트남 국적을 포기한 상태라 갈 곳도 없는 상태라고 하소연했다.
또 한 사람의 라이따이한으로, 역시 한국인 아버지 초청으로 2003년 한국에 온 정수범(40) 씨는 베트남 국적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국적 취득 전까지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도록 돼 있어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내가 왔을 때는 한국 국적을 먼저 취득한 뒤 베트남 국적을 포기하도록 돼 있어 베트남 국적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베트남 국적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
정 씨는 "베트남에서 아버지가 사용하던 명함과 운전면허증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며 "평생 한국인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지금 한국에서 국적을 얻기 위해 10년간 서울과 부산 등 친구들의 사정이 허락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떠돌고 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 역시 국적 취득 시험에서 계속 떨어졌고 올 초 더이상 국적 신청을 못하도록 하는 '귀화불허통지서'를 받은 상태이다.
그는 소송을 냈고 소송 중에는 강제송환을 못한다는 규정에 따라 출입국관리당국은 그에게 6개월짜리 비자를 내줬다. 이 비자는 내달 8일 기한이 만료된다. 기간 만료 직전 패소 판결이 나오면 자칫 강제송환 당할 수도 있다.
오 씨 역시 시험에서 연거푸 떨어진 뒤 귀화불허통지를 받았다가 소송을 통해 다시 귀화 신청을 할 수 있게 됐다.
오 씨는 그래도 일찍 국내로 들어와 한국 국적을 취득한 누나와 형이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어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정 씨는 근로자로 와 있는 베트남 친구들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다.
약 두 달 전 이들의 내방을 받았다는 (사)안산이주민센터 박천응(52) 대표(목사)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성 차원에서 베트남을 돕는데 많은 예산을 쓰고 있고 베트남 등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10여 년을 저렇게 방치된 상태로 살아왔는지 놀라울 따름"이라고 개탄했다.
박 대표는 "10여년간 이들을 무국적자로 만들고 무직자로 연명하게 만든 한국의 관계당국이 전향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자격시험에 통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들은 국적 취득 대상이 아니라 국적회복 대상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65세 이상의 중국 조선족 동포나 탈북새터민들은 일정한 절차를 걸쳐 시험 없이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이따이한 역시 최소한의 의사소통만 가능하다면 한국 국적을 부여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10여 년째 동병상련의 처지에서 서로 의지하며 산다는 오 씨와 정 씨는 "한국정부가 우리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한국인이 아님을 정부가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은 "한 번은 술김에 함께 자살해 버리자는 말도 했다"며 힘없이 웃었다.
1998년 6월 이전에는 민법상 인지신고(호적 등재)로 국적 취득이 가능했지만 이후에는 국적법이 바뀌어 국적법상 인지신고는 미성년자에 한하고, 성인일 경우에는 특별귀화나 간이귀화를 위해 귀화 시험을 쳐야 한다.
법무부는 관계자는 "민법상 미성년자와 성년을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성년자와는 달리 성년은 독자적인 생활 및 인식 능력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 신분 상태에서 국적을 취득할 경우 어느 정도의 검증 절차를 거치도록 하기 위해 귀화 시험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