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공했지만 더 이상 다문화 소리 듣고 싶지 않았는데
- 어느 순간 내가 할 몫에 대해 생각하던 중 해밀학교 시작
- 가장 힘들 때가 사춘기 중학생, 이때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다
- 저도 이상한 눈으로 보는 눈길 느끼고 자격지심도 있을 수 있어
- 나를 인정하고 거기서 시작하는 게 가장 빠른 길
- 해밀,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이란 뜻의 학교 이름
- 다문화 가족 아이들, 학교 밖 아이들이 전국에서 모여
- 학교 교과목, 악기, 요리, 자연학습 등 다양한 학습
- 전화기 사용 여부, 한 달간 토론해 주중 사용 않기로 아이들 스스로 결정
- 대한민국 사람으로 자라, 어디선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5년 1월 16일 (금)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인순이(가수)
◇ 정관용> 국제문화대안학교, '해밀학교'의 이사장. 가수 인순이 씨 오늘 스튜디오에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인순이>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정관용>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즘 많이 바쁘시더라고요.
◆ 인순이> 조금요, 네.
◇ 정관용> 해외 공연도 바로 얼마 전 갔다 오셨죠?
◆ 인순이> 네, 1월 초에 바로 다녀왔어요.
◇ 정관용> 어디 갔다 오셨죠?
◆ 인순이> 일본 쪽에 다녀왔고요. 간 김에 하루 이틀 또 놀다오고요.
◇ 정관용> 해외여행 가시면 한목 좀 챙겨 오시고 그러지 않아요?
◆ 인순이> 한목까지는 아니고요. 조금씩 챙겨오죠.
◇ 정관용> (웃음) 그 돈이 이제 학교로 들어가고 그러는 거죠?
◆ 인순이> 그렇죠. (웃음)
◇ 정관용> (웃음) TV 토크쇼도 맡으셨더라고요?
◆ 인순이> 네, 그냥 보통 일반분들 주로 많이 나오세요.
◇ 정관용> 그러니까요. 그나저나 아버지가 기억나기는 해요?
◆ 인순이> 기억 잘 안 나요. 그냥 아버지가 있으니까 당연히 내가 태어난 거고요. 그리고 어떤 운명이든 내가 받아들여야 될 것은 받아들여야 할 것 같고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실은 다른 한 쪽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고 그분은 기억하시는 안 하시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고요. 또 그 가족들은 당연히 모를 거고요. 하지만 저는 가끔마다 그분이 어떻게 늙어가고 계실까 어떤 모습일까라는 하는 궁금증도 있고 만나고 싶기도 하지만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것도 제 몫인 것 같기도 해요.
◇ 정관용> 네, 살아계신 것은 확인하고 있는 거예요?
◆ 인순이> 저는 아예 찾아보지 않았어요.
◇ 정관용> 아, 그러면 확인도 아직 안 됐군요?
◆ 인순이> 네.
◇ 정관용> 그러나 그냥 혼자 상상 속에 어떻게 늙어가고 계실까, 이렇게만 그냥 그리신다?
◆ 인순이> 네. 제가 만나서 뭔가 거기에도 획기적으로 정말 좋은 일이 있다거나 기뻐하실 수도 있겠지만 갑자기 나타난 이 일에 대해서 그 가족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면 제가 지켜줘야 될 부분인 것 같기도 해요.
◇ 정관용> 하지만 어려서는 원망도 많이 하시고?
◆ 인순이> 그런데 생각보다 원망을 많이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냥 저를 잘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다양한 이유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작년 11월에 제가 미국 공연을 또 다녀왔거든요. 그런데 댈러스에 갔는데 그 주최 측에서 저한테 상의가 왔어요. 거기에 참전했던 분들 모실까요? 그러기에 모셔달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공연 도중에 교민들 전부 일어나셔서 그분들께 박수를 주시고요.
◇ 정관용> 한국전에 참전하셨던?
◆ 인순이> 네, 당신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가 지금 이만큼 성장했다라고 말씀드리고 박수 드렸고요. 끝나고 난 다음에 무대에 전부 올라오시라고 해서 사진을 찍었어요. 제가 여쭈어 봤어요. 한국전 때, 한국에 오셨을 때 나이가 어떻게 되셨습니까라고 여쭈어 봤더니 17, 13, 19세였어요.
◇ 정관용> 20살도 아니고?
◆ 인순이> 네.
◇ 정관용> 저는 갓 20살, 이러려고 했더니…(웃음)
◆ 인순이> 아니요, 제 딸이 21살이거든요? 아직도 철없는 것 같아요, 아직도 아기 같고요. 그러면 17살이면 고등학생이거든요. 여자애들 꽁무니 쫓아다니면서 깔깔대고 웃고 그럴 나이에 남의 나라 전쟁에서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리고 무슨 책임감을 느낄 수 있겠어요, 그 나이에. 살아 돌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고마웠을 수 있는 그런 어린 나이에, 내 아이를 생각한다면 그 누구의 아이였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 정관용> 마음이 이만큼 넓어지셨네요.
◆ 인순이> 이제 세월을 좀 살고 또 엄마가 되다 보니까 다양한 방법으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웃음)
◇ 정관용> 산전수전, 공중전, 수중 전까지 다 치르셨습니다. 이런 국제문화대안학교를 설립하시게 된 배경취지 뭐 구구절절이 설명 안 해도 다들 금방 느낌이 올 겁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땠는데…' 그 생각이셨던 거잖아요.
◆ 인순이> 맞아요, 맞습니다. 사실 저 성공했잖아요. 더 이상 다문화 소리 듣기 싫고요. 다문화 틈에 끼이고 싶지 않아요. 나는 특별하지 않더라도 그냥 특별하게 봐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할 몫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어요. 내가 이만큼 사랑을 받고 이만큼 성공했으면 분명히 나한테 어떤 일을 하라고 이만큼 성공시켜 준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그래, 굳이 이게 흉이 될 것도 없는 거고 어차피 나도 알고 당신도 아는 이 모든 것을 나 혼자 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냥 탁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생각하던 중에 한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 학교는 중학교예요.
◇ 정관용> 중학교만 있습니까?
◆ 인순이> 고등학교는 내년부터 시작해요, 이제 이 아이들이 올라가서요. 가장 힘들 때가 중학생 때 사춘기 올 때라고 저는 생각하고요.
◇ 정관용> 본인도 그랬어요?
◆ 인순이> 좀 그랬죠.
◇ 정관용> (웃음)
◆ 인순이> 그때 내가 아이들 옆에 있어주면 어떨까. 엄마, 아버지 세대의 일들은 그 세대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잘 살아야 된다라는 얘기도 해 주고 싶고요. 그리고 이제는 뭐 세계가 하나가 되는데 다른 것이 그렇게 크게 아픔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라는 생각도 해 주고 날 봐라, 나는 힘들고 나는 내가 버려진 아이인 줄 알았는데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는 것을 봐라. 열심히 하면 어떤 조건 없이 어떤 선 없이 마음을 써 주시더라.
◇ 정관용> 저는 조금 아까 인순이 씨 그 얘기를 듣다가 갑자기 코끝이 찡했는데, '저 성공했잖아요' 한 다음에 '나는 이제 좀 특별히 대접받고 싶다, 나는 다문화 틈에 끼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셨어요.
◆ 인순이> 네.
◇ 정관용> 솔직히 지금도 그런 마음도 들었었어요, 불과 몇 년 전까지?
◆ 인순이> 지금도 그래요, 솔직히요.
◇ 정관용> 그래요?
◆ 인순이> 네. 저도 인간이잖아요. 뭐가 다르다고 거기에 선 그어서 이쪽 편으로 보내진 게 그게 뭐가 기분 좋은 일이겠어요.
◇ 정관용> 그래요, 인순이 씨 정도 되면 그거 다 넘어섰을 줄 알았는데…
◆ 인순이> 넘어서기에는 너무나 분명한 것 아닐까요?
◇ 정관용> 그래요?
◆ 인순이> 넘어섰다기보다는 그것을 알고.
◇ 정관용> 그런데 인순이한테도 이상한 눈초리로 본다는 말이에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 인순이> 아니기는 하지만 저는 느끼잖아요. 제가 항상, 제 가슴속에는 있고 왜 그냥 아주 원색적인 표현이라면 자격지심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죠.
◇ 정관용> 그런 거군요.
◆ 인순이> 어떻게 누가 그것을 없다고, '너는 아니야'라고 한들 아닐 수가 있어요, 그건 아니잖아요.
◇ 정관용> 제가 아무리 역지사지를 하려고 해도 그 입장이 안 되어 봤기 때문에 제가 넘나들 수 없는 선이 그런 데 있군요. 아, 지금도 인순이 씨의 마음을 모르겠다…
◆ 인순이> 나를 인정하고 알고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 가장 제가 볼 때는 빠른 길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 정관용>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게 아닌 것은, 없는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그걸 넘어서야 된다, 아이들한테 그걸 알려주시는 거군요.
◆ 인순이> 알려주고 싶어요, 그것을요.
◇ 정관용> 인순이 씨를 아이들이 다 좋아하잖아요?
◆ 인순이> 좋아하죠, 네.
◇ 정관용> 그것도 히트곡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니까. (웃음)
◆ 인순이> (웃음) 그런데 아이들은 저를 가수로 생각을 안 해요. 그리고 아이들 앞에서는 거의 노래를 안 불러봤어요.
◇ 정관용> 아이, 그래도 아이들이 텔레비전 다 보잖아요.
◆ 인순이>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갈 때 맨날 부스스한 모습으로 가거든요. 제가 작년 축제 때 처음으로 무대에서 노래 한번 했어요. 그때는 MBC 초청으로 한국 혼혈인들 입양돼 가신 분들이 오셨어요, 저랑 비슷한 동년배분들이. 저희 학교 축제할 때 그분들이 방문하셨거든요. 그래서 그분들께 노래를 불러드리기 위해서 제가 무대 한번 올라갔었죠.
◇ 정관용> 그래요. 다시 이제 학교 얘기로 잠깐 갑시다. 해밀, 무슨 뜻이에요?
◆ 인순이> 순 우리나라 말이고요.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이라는 뜻입니다.
◇ 정관용> 아, 좋다!
◆ 인순이> 정말 좋죠, 슬픔이 끝까지 있을 수는 없잖아요.
◇ 정관용> 누가 정했어요?
◆ 인순이> 저요.
◇ 정관용> 아, 이 단어를 찾아내셨어요?
◆ 인순이> 찾았죠.
◇ 정관용> 이야…
◆ 인순이> 제가 딱 좋아하는 이 단어를 찾은 거예요.
◇ 정관용> 지금 이게 몇 학급이에요?
◆ 인순이> 한 학급밖에 없어요, 사실은.
◇ 정관용> 몇 명이에요?
◆ 인순이> 21명인데요. 다문화 아이들이 12명, 우리 일반 아이들이 9명.
◇ 정관용> 일반 아이들도 있어요?
◆ 인순이> 네. 학교 밖 아이들이요.
◇ 정관용> 학교 밖 아이들?
◆ 인순이> 네, 학교 적응 잘 못하거나 그런 아이들… 잘 어울려 있어요.
◇ 정관용> 처음 시작할 때 몇 명으로 시작했습니까?
◆ 인순이> 6명이요.
◇ 정관용> 그러다 이제는 21명으로.
◆ 인순이> 네.
◇ 정관용> 한 학년이 21명?
◆ 인순이> 아니에요, 전체가요. 2학년까지 있어요.
◇ 정관용> 그러니까 개교한 지 2년 되니까 1, 2학년까지 있군요. 그 학생들이 올해 3학년이 되는 거고 1학년 신입생 이제 뽑겠네요?
◆ 인순이> 네, 뽑아야죠. 저희는 신입생도 뽑지만 중간에 편입돼 들어온 아이들도 오고 있어요. 그리고 중도입국 아이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요, 요즘에요. 그러니까 엄마가 결혼해 오셨는데 그쪽에서 결혼하셔서 전에 아이가 있으신 분들, 엄마 마음이 그렇잖아요. 내 옆에 끼고 있고 싶잖아요. 그래서 데려오는 아이들이 많은데 그 아이들은 한국말 전혀 잘 못해요.
◇ 정관용> 그렇겠네요.
◆ 인순이> 그런 아이들도 몇 명 있어요. 그래서 나이가 연령층도 조금 다양하고요.
◇ 정관용> 그러니까 같은 나이로 중학교 1학년이 아니고. 몇 살 차이가 나고 그렇겠군요.
◇ 정관용> 그리고 올해 중3 되고 그리고 또 내년 되면 고등학교도 만들어집니까?
◆ 인순이> 네, 만들어져요.
◇ 정관용> 아, 그래요. 이 아이들 전부 다 기숙사 생활한다고요?
◆ 인순이> 네, 저희 한 집에서… 남자아이들 기숙사 따로 있고요. 또 여자 아이들 기숙사 따로 있어서 잘 지내고 있어요.
◇ 정관용> 한국말 잘 못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해요, 그러면?
◆ 인순이> 아이들이 같이 놀면서 금세 배워요. 글이 조금 늦기는 한데 또 한국어반이 따로 있어서 아이들이 계속 배우고 있어요.
◇ 정관용> 그 정규교과 과정, 이런 게 다 일반학교와 똑같이 합니까, 아니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 인순이> 일반 학교 교과목도 하고 있고요. 그리고 남는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런데 그 시간이 딱 끝나면 그 뒤부터 수영, 태권도도 있고 요리 그다음 목공, 노작 그다음에 음악. 음악은 기타 배우는 악기 시간도 있고요, 이론, 합창 배우는 시간도 있는데 합창은 제 콘서트에 그 코러스 리더가 아이들을 가르쳐요. 아이들은 이미 동요를 안 좋아하잖아요.
◇ 정관용> (웃음)
◆ 인순이> 그러니까 이제 가요를 가지고 발성과 이론을 다 가르치고요. 또 진미령 씨가 요리를 가르쳐요.
◇ 정관용> 그래요?
◆ 인순이> 네. 꼬르동 블루 수료했잖아요, 요리학원이요.
◇ 정관용> 그래요? 노력봉사로, 자원봉사로 와서?
◆ 인순이> 네. 재료까지 다 사 와서 만들고 아이들 한 끼 맛있게 먹이고 그리고 가세요.
◇ 정관용> 일주일에 한 번씩?
◆ 인순이> 한 달에 한 번씩이요.
◇ 정관용> 한 달에 한 번. 인순이 씨도 뭘 가르쳐요, 음악 가르칩니까?
◆ 인순이> 저는 안 가르쳐요. 저는 아이들하고 그냥 이런저런 얘기해요.
◇ 정관용> 처음 만들 때는 교장 선생님도 하시지 않았어요, 그렇죠?
◆ 인순이> 했어요, 작년 여름 학기까지요. 가을 학기에 교장 선생님이 새로 오셨어요. 그전까지는 부모님들도 약간 좀 제가 있어 주기를 원하시고요. 아이들도 제가 옆에 어느 정도 있어야 되겠다라는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또 선생님들께도 내가 좋아하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얘기 또 내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 아이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 얘기들을 계속 얘기를 하는 거죠.
◇ 정관용> 중간 소통, 가교 역할을 하시고?
◆ 인순이> 네. 그런데 이제 가을에 정말 좋은 교장 선생님을 몇 달 간 노력 끝에 모셨습니다.
◇ 정관용> 교육 전문가로?
◆ 인순이> 네, 그렇죠.
◇ 정관용> 그러면 초창기 만들고서는 거기 거의 상주하셨어요?
◆ 인순이> 상주는 안 하고요. 한 일주일에 한 번, 두 번 이렇게 내려가 있었어요.
◇ 정관용> 요즘도 계속 그렇게 한두 번씩 가세요, 요즘은 그렇게 바빠서 못 가시죠?
◆ 인순이> 겨울에 12월 같은 경우에는 그때도 갔어요. 왜냐하면 방학식하고 교과발표회, 이런 것은 또 가거든요
◇ 정관용> 가야죠.
◆ 인순이> 그래서 바빠도 내 생각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갔던 것 같고요.
◇ 정관용> 방학 때는 그 아이들 어떻게 지내요, 그러면?
◆ 인순이> 집에서 있는데요. 사실은 그것도 걱정이 그냥 놀고 있잖아요, 뭐 학원을 간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이 아이들이 책을 읽으라고 하지만 또 집에 가서 놀다 보면 저희 때도 책 읽으라고 해도 안 읽잖아요. 그래서 걱정하고는 있는데 또 건강하게 엄마랑 있다가 잘 오더라고 요.
◇ 정관용> 어쨌든 방학 때는 기숙사는 문을 닫으니까. 전부 강원도 홍천 인근에 사는 아이들이에요, 그건 아니죠?
◆ 인순이> 아니에요, 전국 단위예요.
◇ 정관용> 그렇죠? 제일 멀리 어디서 올라오는 아이도 있어요?
◆ 인순이> 안산 또 온양, 그런 데서도 오고요. 저번에 있던 아이는 창원에서도 왔었고요.
◇ 정관용> 네. 그러니까 요즘은 농촌에는 특히 한국으로 시집 온 며느리들이 많잖아요. 외국 며느리들 또 그 자녀들. 그래서 초등학교 이런 데 보면 한 학급에 3분의 1 정도씩 다문화가정 아이들도 있고 일반 학교에 이렇게 많이 있잖아요. 특히 이 해밀학교는 다문화 아이지만 대안학교의 성격으로 학교에 바로 적응하기 어려운 아이들, 이런 아이들이 주로 오는 그런 학교인거죠?
◆ 인순이>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도 와요. 왜냐하면 많은 아버지들이 아이가 엄마의 나라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원치 않으세요. 엄마하고 아이만 얘기를 나누니까 그러다 보니까 또 아버지는 집안에서 아이들하고 얘기를 많이 안 나누잖아요. 그러니까 한국말이 집안에서도 안 늘어요. 그리고 이제 학교를 가면 학교에서도 안 느는 거예요.
◇ 정관용> 자기 친구들하고만 얘기를 해요?
◆ 인순이> 친구들하고 얘기를 하더라도 뭔가 더 심도 있는 얘기를 못하는 거죠, 교과목을 못 따라가고요. 그러니까 거기서 자꾸 뒤쳐지잖아요? 그래서 오는 아이들도 있고요.
◇ 정관용> 전액 무료로 하죠, 아이들?
◆ 인순이> 아니요, 무료는 아니고요. 교육비는 안 받는 대신에 기숙사비.
◇ 정관용> 기숙사비는 받고?
◆ 인순이> 네, 저희가 25만원씩 지금 받고 있는데 올해부터는 10만원쯤 올릴까 생각을 하고 있어요.
◇ 정관용> 왜요?
◆ 인순이> 좀 올려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 정관용> 수익자부담 원칙도 있네요, 그렇죠?
◆ 인순이> 아, 그리고요. 올린다, 안 올린다가 문제가 아니고 꼭 내야 하는 이유는 부모님이 책임을 지셔야 되는 부분에 대한 거예요.
◇ 정관용> 맞아요, 맞아요.
◆ 인순이> 이게 모든 것을 나라가 다 책임질 수는 없잖아요. 물론 저희는 나라가 책임을 안 지고 후원자분들이 후원해 주시고 제가 하는 걸로 하는데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는 모든 목표가 그리고 모든 것이 나 위주로 돌아갔지만 아이를 낳고 나면 우리의 꿈도 아이한테 맞춰지잖아요. 아이한테 더 잘해 주고 싶고 내가 열심히 돈을 버는 이유는 아이의 학원을 더 보내주고 싶고 이런 이유가 있어야 되잖아요?
◇ 정관용> 그럼요. 또 책임질 만큼 책임져야죠, 부모들이.
◆ 인순이> 네, 이런 것을 안 하고 모든 것을 다 공짜로 한다면 그 부모들은 하는 일이 없고 아이에 대한 책임이 없으면 그만큼 애정도 떨어질 것 같은 거예요.
◇ 정관용> 기숙사비 같은 것은 다 이제 실제 들어가는 비용들이니까 그것은 필요할 것이고 교사들은 몇 명이나 있습니까?
◆ 인순이> 지금 상주하는 교사분들이 한 10명 계시고요. 또 강사 선생님들이 열두 분 계시고요. 그리고 또 그 외로 이렇게 시간시간 와서 자원봉사 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 정관용> 상주 선생님이 10명이나 돼요? 아이가 21명인데?
◆ 인순이> 네, 거기다가 또 교무… 뭐라고 하죠?
◇ 정관용> 서무?
◇ 정관용> 네, 그런 쪽도 선생님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리고 또 밥 선생님도 계셔야 하고…
◇ 정관용> 어쨌든 학교는 학교니까.
◆ 인순이> 네.
◇ 정관용> 그리고 또 21명 아이들의 상주 인원 10명이면 아주 대단하네요, 그렇죠?
◆ 인순이> 네, 거기다가 그냥 인원뿐이 아니라 선생님들이 거의 한 분이 두 과목씩 가르치거든요? 그러면서 열정이 대단하세요. 아이들하고의 그런 끈끈한 관계도 너무 좋고요. 그리고 제가 또 자랑하고 싶은 것은 저희 학교는 전화기를 안 써요.
◇ 정관용> 전화기가 없어요?
◆ 인순이> 아이들이 없어요.
◇ 정관용> 왜요?
◆ 인순이> 일요일 저녁 때 들어오면 일요일까지 막 보다가 월요일에 딱 학교에 맡기면 금요일 저녁까지 전화기를 돌려주지 않아요. 그런데 이것을 저희가 1주일에 한 번씩 총회를 해요. 거기에 안건을 올려서 한 한 달간을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 정관용>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 인순이> 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전화기 없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잘 몰라요. 그게 너무 감사한 거예요.
◇ 정관용> 그런데 스스로 결정했다는 게 참 좋네요.
◆ 인순이> 네, 저희는 모든 걸 다 안건을 올려서 그걸 갖고 결정을 해서 그게 지켜지는…
◇ 정관용> 그 많은 분들의 인건비, 학교 운영비 등등 다 적지 않게 들어갈 텐데 도와주시는 분들 많습니까?
◆ 인순이> 한 이백여 분 계세요. 그래서 저희가 들어가는 것의 3분의 1 정도가…
◇ 정관용> 정기적으로 그분들은 도와주시는 거예요?
◆ 인순이> 네.
◇ 정관용> 그런데 3분의 1밖에 안 돼요?
◆ 인순이> (웃음) 그래도 저희는 정말 감사하죠. 처음에 시작할 때는 혼자 시작했는데.
◇ 정관용> 그러면 나머지 3분의 2는?
◆ 인순이> (웃음)
◇ 정관용> 인순이 씨 혼자?
◆ 인순이> 네.
◇ 정관용> 많이 버셔야 되겠네요. (웃음)
◆ 인순이> 열심히,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어요.
◇ 정관용> 더 많은 분들이 후원에도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 인순이> 아,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또 6㎞ 떨어진 곳에 폐교를 저희가 하나 샀어요. 그걸 지어야 되거든요.
◇ 정관용> 추가로 매입을 했군요? 고등학교도 만들어야 하고 하니까.
◆ 인순이> 지금 있는 데는 3년 빌려서 쓰는 거고요. 여기는 지어서 가는데 뭔가 그냥 작은 후원이라도 벽돌 한 장 아니면 전구 구슬 하나, 칠판 하나 이렇게라도 후원해 주시면 저희는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 정관용> 어렸을 때면 지금으로부터 한 4, 50년 전인데?
◆ 인순이> 어, 그렇게? (웃음)
◇ 정관용> (웃음) 맞잖아요, 뭘 그러세요?
◆ 인순이> 어머, 이상하네요. (웃음)
◇ 정관용> 그런데 지금 그때에 비하면 이른바 다문화 가정도 많아졌고 그러잖아요? 우리 사회 좋아지고 있습니까, 그쪽 분야에서?
◆ 인순이> 네, 많이 좋아지고는 있어요. 그런데 마음의 문을 조금 더 열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대한민국 사람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보면 우리 때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냥 안 받아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저희가 자생력이 좀더 많은 것 같고요. 요즘 아이들은 나는 한국 사람이라며, 왜? 이런 생각들을 가질 수가 있거든요, 사실은. 그래서 조금 더 이 아이들이 그냥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자라서 어디에선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참 좋겠어요.
◇ 정관용> 그리고 그 아이들이 엄마 나라가 됐든 아빠 나라가 됐든 그 나라와의 문화교류, 경제교류의 첨병이 될 수도 있고.
◆ 인순이> 당연하죠.
◇ 정관용> 대한민국 국제화의 최일선의 일꾼들이 또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인순이> 당연하죠. 제가 볼 때는 국경이 선으로 그어지는 게 아니라 문화로 그어지는 것 같아요.
◇ 정관용> 당연하죠.
◆ 인순이> 저는 고추장, 된장 먹고 자랐기 때문에 미국가도 적응을 잘 못 해요. 아, 재밌어요. 놀다 오는 건 재밌는데 저는 그게… 그리고 명동가면서 어깨도 부딪혀 가면서 다녀야 이게 한국 같죠.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좀 커나가게 되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그러잖아요. 그것이 분명히 문화로 인해서 엄마가 여기에 살고 아빠가 여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팔이 안으로 이쪽으로 굽게 되어 있거든요. 사실 얼마 전에 제가 미국 뉴욕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라는 그런 단체가 벌어질 때 제가 거기서 노래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님 그분이 스피치를 하시고 그러고 나서 제가 노래를 부르는 거였어요. 한쪽에 성조기, 한쪽에 태극기가 이렇게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성조기와 태극기 사이에 제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 주세요'라는 얘기를 했고요.
◇ 정관용> 아, 그렇죠. 그러면 미국 사람들은 더 좋아할 수도 있어요.
◆ 인순이> 그럼요. 그리고 우리나라 분들도 또 역시 좀더 뭔가 '아, 저사람 누구야'라고 하면서라도 말꼬리가 터질 수가 있고요.
◇ 정관용> 당연하죠.
◆ 인순이> 그런 얘기를 하고 거기서 노래를 부르고 또 '용감한 나라에 아버지를 주시고 해 돋는 나라에 어머니를 주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씀도 또 드렸거든요.
◇ 정관용> 명언이시네요, 용감한 나라의 아버지, 해 돋는 나라의 어머니. 이야, 시를 쓰셔도 되겠는데요? (웃음)
◆ 인순이> 그렇게 어디에선가 작은 몫이라도 할 몫이 분명히 생기고요.
◇ 정관용> 그럼요.
◆ 인순이> 제가 최근에 기부 때문에 이런저런 데를 가다 보면 요즘에 우리나라 기업체들이 동남아로 많이 나가잖아요. 그러면 동남아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기용해서 쓰잖아요, 많이요.
◇ 정관용> 당연하죠.
◆ 인순이> 그러면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팔이 안으로 굽는다면 그 사람은 저쪽으로 굽잖아요. 그 대신에 우리 아이가 빨리 커서 간다면 여기는 엄마 나라, 우리 엄마가 이 나라 사람이다라고 얘기하고 문화는 우리 쪽이잖아요.
◇ 정관용> 대한민국 국민이고?
◆ 인순이> 네. 그리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는지 보면서 자랐고요. 그러니까 그 나라에서 만약에 점심시간 후에 뭐 30분이고 1시간이고 휴식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얘기했을 때 우리나라는 그렇게 안 하고 이런이런 식으로 했다라고 얘기를 해서 절충안을 찾을 수도 있는 거고요. 그렇게 뭔가 이렇게 완충작용을 할 수 있는 큰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잘만 키우면.
◇ 정관용> 제가 그렇게 세계화의 국제 시민으로서의 어떤 첨단일꾼 이런 표현을 써서 그쪽 얘기가 좀 나왔습니다마는 1백가지, 1천가지 이유 다 필요없어요. 그냥 우리 아이들이잖아요.
◆ 인순이> 당연하죠.
◇ 정관용> 이제는 정말 눈을 다 말끔히 씻고 따뜻한 마음으로 잘 안아줄 수 있어야 되고요. 인순이 씨가 오래 전부터 많이 흘려왔던 눈물들, 이제는 더 안 흘릴 수 있는 그런 세상 빨리 만들어야죠.{RELNEWS:right}
◆ 인순이> 네, 감사합니다.
◇ 정관용> 아무튼 고생 많으십니다, 이사장님. (웃음)
◆ 인순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웃음)
◇ 정관용> 오늘 고맙습니다.
◆ 인순이> 네, 고맙습니다.
◇ 정관용> 국제문화대안학교 해밀학교 인순이 이사장님을 함께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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