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고위 관계자나 국내·외 수사기관의 비밀요원을 사칭해 금품을 가로채는 사기가 기승을 부린다.
청와대 직원을 사칭하거나 전·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한다고 속이는 것은 고전적 수법이다.
최근 진화한 사기 시나리오에는 국가정보원이나 미국중앙정보국(CIA)의 비밀요원이 등장한다.
14일 검찰과 법원에 따르면 최근 대전에서는 국정원 비밀요원을 사칭해 총 4억여 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로 기소된 이모(36) 씨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씨는 지난해 3월 28일 대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여성에게 "높은 직급의 국정원 블랙(비밀)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속인 뒤 교제를 시작했고, 올해 1월까지 동거했다.
이 씨는 "전 국정원장이 작은아버지"라며 청와대 전경이 찍힌 휴대전화 사진과 고급 외제승용차 사진을 보여줬다.
또 1억 원 상당 상품권(오만원권 2천 매)을 동거녀에게 맡겨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재력을 과시했다. 이 상품권은 발행업체가 폐업해 사용할 수 없는 휴짓조각이었다.
이 씨는 각종 감언이설을 쏟아내 동거녀가 자신을 믿게 한 뒤 '사기꾼' 본색을 드러냈다.
지난해 4월 동거녀에게 "사무실 인테리어 시공을 하는데 자금이 없어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돈을 빌려주면 공사가 끝나는 대로 모두 갚고, 건물 1층에 수입가방 등을 판매하는 명품 숍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체크카드를 받아냈다.
이 씨는 그해 5월 회사 직원 급여 명목으로 400만 원을 송금받는 등 올해 1월까지 모두 95차례 2억6천여만 원을 받아 가로챘다.
이 씨의 사기 행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2014년 6월에도 "여당의 정치자금도 관리했다"며 "법인을 인수하는데 투자하면 다음 달까지 투자원금을 반환하고 법인 이사로 올려 법인카드와 차량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속여 4명으로부터 1억6천여만 원을 가로챈 혐의도 받았다.
과거에는 청와대 직원을 사칭하거나 전·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한다며 거짓말로 투자를 유인해 거액을 뜯는 사기가 많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기범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청와대 경호실 직원을 사칭해 고위 인사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돈을 받아 챙기거나 대통령 명의의 표창장을 위조해 범행에 사용하는 식이었다.
2년 전에는 전·현직 대통령의 비밀조직을 총괄하는 권력기관에 몸담고 있다며 각종 거짓말로 투자를 유인해 거액을 뜯어낸 사기단이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이처럼 국정원이나 미국 CIA 등 피해자들이 확인할 수 없는 권력기관 직원을 행세하는 수법이 부쩍 늘었다.
무역업을 하다가 경영난을 겪은 A(42) 씨는 2013년부터 2년간 B(51) 씨 등 지인 2명과 함께 수도권 일대에서 사기 행각을 벌였다.
A 씨는 "청와대에서 일하는 B 씨가 국가 비자금을 관리한다"며 "비자금으로 모을 금괴에 투자하면 많은 수익을 돌려주겠다"고 접근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피해자에게는 "B 씨가 미국 CIA 요원인데 미국 비자금에 투자하라"며 돈을 뜯어냈다.
A 씨가 이런 수법으로 3명에게서 가로챈 돈은 모두 2억8천만 원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A 씨는 검찰 조사에서 "B 씨가 진짜 미국 CIA 요원인 줄 알았다"며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인천지검 수사과는 사기 혐의로 A 씨를 구속하고 달아난 주범 B 씨를 지명수배해 쫓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국정원 직원이라고 사칭하고 대기업에 취업시켜주겠다며 피해자 4명으로부터 1억6천만 원 상당을 챙긴 남성이 징역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사기 사건 수사 경험이 많은 한 경찰 관계자는 "사기범들은 두뇌 회전이 빠르고 연기력이 배우 뺨칠 정도로 좋다"며 "특히 국정원이나 CIA와 같이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 직업인 비밀요원이라고 하면 피해자들이 확인할 방법이 없어 속기 쉽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