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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건 9급 공무원뿐인 헬조선의 슬픈 자화상

책/학술

    믿을 건 9급 공무원뿐인 헬조선의 슬픈 자화상

    신간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9급 공무원 시험 응시 지원자 22만 명, 평균 경쟁률 54 대 1이라는 통계와 ‘공시생’, ‘공시족’ 등의 신조어를 통해 알 수 있듯, 공무원 열풍은 각박한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신간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믿을 건 9급 공무원뿐인 헬조선의 슬픈 자화상' 저자는 노량진에서 ‘공무원이 되고픈 사람들’을 밀착취재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개인이 누려야 할 평범한 권리를 보장해주지 않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친다. 각종 스펙을 요구하는 취업 경쟁에서 밀려난 명문대 학생, ‘지잡대’ 출신이라는 불평등을 피하고 싶은 지방대 학생, 부당한 월급과 노동에 지친 비정규직 노동자, 저녁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회사원, 오십 살도 안 되어 은퇴한 중년, 사회 경력이 단절된 주부, 수능 대신 공무원 시험을 선택하는 고등학생, 공무원 말고는 사회 진출이 불가능한 장애인 등 이들이 공무원 시험을 결심하게 된 이야기를 하나로 모으면 ‘가장 객관적인 한국의 모습’이 완성된다. 각 계층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없는 ‘헬조선’에서 그나마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유토피아는 ‘9급 공무원’뿐이다.

    이 책은 노량진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수험생들이 어떻게 시간을 관리하며 생활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모든 것이 공무원 시험공부에 최적화된 노량진은 마치 도시 속에 떠 있는 섬처럼 속세와 차단된 공간이다. 이곳엔 다양한 고시학원, 스터디룸, 독서실, 뷔페형 식당, 컵밥 거리, 코인 노래방 등 공시생들의 수험 생활을 위한 맞춤형 시설이 즐비하다. 좋은 자리에서 강의를 듣기 위해 새벽 6시에 학원으로 향하고, 점심 먹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컵밥을 먹으며 영어단어를 외우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한 문제라도 더 맞추기 위해 암기방을 활용하는 등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생활하는 공시생들의 꿈은 오로지 ‘합격’뿐이다. 단번에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기에, 노량진의 열기는 그 어느 곳보다 뜨겁다. 이런 공시생들에게 ‘도전 정신이 없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무기력한 청춘’이라는 수식을 과연 붙일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개인이 존엄하게 살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교육이 전혀 없다. 그래서 한국은 비판할 지점들이 너무나 많음에도, 비판이 사라진 사회가 되었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도리어 ‘진지충(蟲)’이라고 조롱하며, ‘왜 이렇게 경쟁해야 하는가’라는 대안 없는 비판보다는 ‘어차피 경쟁은 피할 수 없다’는 순응을 바탕 삼아 ‘경쟁에서 이길 묘수를 찾는’ 대안이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무원만이 희망’으로 귀결되는 논의는 결국 불합격자 숫자를 엄청나게 늘릴 뿐이고, 몇 년을 노력했지만 얻은 건 허송세월뿐인 사람들이 변변치 않은 일자리에 미래를 맡겨야 하는 악순환을 만들 뿐이다. 공무원 시험이 개인에게 ‘탈출구’로 인식되면 현실의 부조리가 덮여버린다.

    저자는 “한국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공무원이란 길’을 선택하지 않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사회에 분노해야 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았으면 한다”고 희망한다. 또한 공무원이 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청춘의 모습을 보려면 어떤 논의를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질문한다. 한국사회는 지금껏 선택한 가치들의 근본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은 그저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강한 청춘들이 아닌, 현재를 만들어낸 한국인 모두를 향한 질문이다. 적어도 아이 때만이라도 대통령과 같은 비현실적인 꿈을 마음껏 꿀 수 있는 사회로 바뀌려면, 지금 한국사회는 어떤 ‘현답’을 찾아야 하는지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

    지방대를 가지 않을 시기를 넘겨버린 많은 이들은 ‘그다음’에 할 수 있는 변신 솔루션을 무조건 찾아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는 상황은 이렇게 발생한다. 그러면 학교의 하향평준화는 ‘더’ 가속화되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지방대의 오명(汚名)은 ‘더’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당연히 이를 싫어할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결국 공무원이 정답이 된다. _ 68쪽, 1부 2장 〈나는 대학을 갔는데 모두가 공무원 준비나 하라 하네〉 중에서

    한국인들은 이미 인간이면서 ‘인간이 되기 위한’ 경쟁을 한다. 누구나 실패하면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강박이 만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을’ 선택하느냐가 무척이나 중요하니 사회 전반적으로 ‘안정적이고 검증된 직업군’(그래서 공무원!)에 대한 맹목적 선호가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다. (중략) 부모들은 “늙어서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택하라”고 밥 먹듯 말한다. 그리고 자녀가 장래희망을 쓰는 칸에 ‘교사’나 ‘공무원’을 적으면 안심한다. 그래서 ‘임용고시’, ‘공무원 시험’이 한국에서는 특수가 된다. _ 104쪽, 1부 3장 〈지금의 지옥만 아니면 된다는 사람들〉 중에서

    5시 6분, 현진 씨는 의정부역에서 출발하는 첫 차를 탄다. (중략) 전철 내에는 드문드문 100퍼센트 노량진역에서 내릴 것이 확실해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제각기의 방식으로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을 결연하게 활용하고 있다. (중략) 전철 창밖으로 63빌딩이 보이면 ‘외딴 섬’ 노량진에서의 하루가 또 시작된다. 현진 씨는 내년에는 이 풍경을 절대 안 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두렵다. 여긴 ‘기약 없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다. _115쪽, 2부 1장 〈그곳은 섬이 아니되, 도시 속 섬처럼 떠 있는 곳입니다〉 중에서

    이제 18~19세의 나이에도 노량진으로 가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한 조사에 따르면 19세 이하 수험생이 전체 대비 27퍼센트 수준이다. 물론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의 선배들과 겨뤄야 하니 초기에 합격하는 경우는 매해 50여 명 안팎에 불과하다. 한 매체는 이 풍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노량진 공시촌에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고졸’과 위태롭고 차별 받는 삶을 겪어본 ‘연륜 있는 고졸들’이 뒤섞여 대졸자와 경쟁하고 있다.” 이 미세한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방법은 ‘더 빨리’, 그러니까 교복을 입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_200쪽, 3부 5장 〈공딩족을 아십니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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