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임시정부의 공인된 조력자는 중국의 국민당이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과 협력에 조국의 독립에 나선 젊은인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의 넋을 기린 곳이 한국인과 중국 공산당이 힘을 합쳐 싸운 '광주기의'를 기리는 '기의열사능원'이다. 이글은 기의열사능원 답사기다.[편집자주]
기의열사능원 전경 (사진=이한얼 기자)
1946년에서 1950년까지 벌어진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것이 일명 '국부천대'로 불리는 사건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현재까지 중국 영토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현재 대만의 전신인 중국 국민당 정부는 1932년 윤봉길과 이봉창의 연이은 의거에 감화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됐다.
국민당의 수장인 장개석은 장사의 남목청에서 이운한에게 저격당한 김구에게 당시 3천 원에 달하는 거금을 치료비 명목으로 주기도 했다.
결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27년의 역사는 중국 국민당과 궤를 같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당시 공산당과 운명을 같이 했던 한국인들은 국민당 정부와 협력했던 임시정부요인에게 가려져 학계나 대중들에게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가려진 이면에 기의열사능원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 광주(廣州)에 위치한 기의열사능원은 광주기의에 참여했다 죽은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공원이다.
'기의'란 의로운 항쟁이라는 뜻이다.
광주기의란 국공합작이 깨진 1927년 12월 광주에서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조직적인 무력 투쟁을 시작하게 된 사건을 말한다.
중국 공산당 소속 군인인 섭검영을 필두로 제 4 교도대 병력 2000여 명이 무장의 중심에 있었고, 이 중 80여명이 한국인이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에 승리했다.
기의열사능원 (사진=이한얼 기자)
광주의 국민당을 전복한 공산당 세력은 자체적인 혁명위를 수립하고 인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를 '광동코뮌'이라고 한다.
하지만 '광동코뮌'은 '3일천하'였다.
광주 전선에서 패퇴한 국민당 군벌은 잠시 숨 고르기를 한 후 3일 만에 다시 광주로 쳐들어왔다.
초반의 전세와는 다르게 공산당 세력은 패배했고, 혁명세력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처형 당했다. 그 수가 무려 5000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서도 처형당한 한국인이 150여 명이나 됐다.
기의열사능원 내에는 이때 처형 당한 한국인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 마련돼 있다. '중조인민 혈의정(血誼亭)'이 그것이다. 이 정자 이름은 '중국과 조선 인민의 피로 맺어진 우의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라는 뜻이다.
기의열사능원 정자 내부에 자리한 중조인민혈의정 기념비 (사진=이한얼 기자)
중조인민 혈의정에서 90도로 꺽인 길 오른쪽에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이 묘는 '광주공사열사지묘로 광주기의 때 죽은 수천 명을 합장한 묘다.
주목할 점은 '광주공사열사지묘' 앞엔 금빛으로 쓰여진 광주기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빼곡한 내용 가운데서도 '조선등국제전우' 즉 "조선을 포함해 여러 나라 사람들이 같이 싸웠다"라고 적혀 있다.
이념을 떠나 남의 나라 혁명에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에 대해 경의와 존경의 표시로 읽힌다.
글 싣는 순서 |
① 임정 루트 4000km, 100년 만의 시간여행 ② 중국에서 꽃 핀 조선 청년들의 기개 ③ 임정 100주년, 中 공산당과 협력한 독립운동가도 기억해야 |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