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송환 반대" 외치는 홍콩 시민들(로이터=연합뉴스)
'범죄인 인도법안'을 반대하며 100만명이 시위에 참여한 홍콩이 미중 무역전쟁의 새로운 최전선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범죄인 인도법안'이 "홍콩 법치를 위협한다"며 중국에 직격탄을 날렸고 중국의 관영 매체는 반대세력이 서방과 결탁하고 있다며 미국을 정조준했다.
9일 홍콩에서는 시위 주최측 추산 103만명, 경찰 추산 24만명이 참여하는 '범죄인 인도법안'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같은 규모는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홍콩에서 벌어진 시위 가운데 최대 규모다. AP통신은 지난 2003년 국가안보법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주화시위 때보다 규모가 더 컸다고 전했다.
이날 오후 3시부터 홍콩의 빅토리아 공원에서 시작된 집회가 끝난 뒤 시위대는 '반송중(反送中·중국송환반대)'이 적힌 피켓을 들고 코즈웨이 베이, 완차이를 지나 애드미럴티의 홍콩 정부청사까지 행진했다. 시위는 밤 11시까지 이어졌으며 일부는 입법회의 입구 철책을 쓰러뜨리거나 경찰에 쇠막대를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고 AP통신은 보도했다.
◆ '中이 언제든 나를 잡아갈 수 있다' 홍콩 시민들 거리로홍콩 정부가 중국을 포함한 타이완(臺灣)과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범죄인 인도법안' 개정을 추진한 것이 발단이 됐다. 중국에 반환된 이후 홍콩은 특별행정구로서 2047년까지 사법자율권이 보장돼 있다. 문제는 중국 반환 20년이 지나도록 홍콩이 아직까지 중국 본토와 타이완, 마카오 등과 범죄인 인도 협정을 체결하지 않아 범죄인을 인도할 법적 근거가 전무했다는 점이다. 이런 '법의 미비' 상황은 지난해 홍콩 거주 남성이 타이완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홍콩으로 도주하면서 더욱 불거졌다. 용의자를 체포했지만 수사를 진행해야 하는 타이완에 인도하지 못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홍콩 당국은 현행법의 '미비'를 보완하기 위해서 법안 추진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어찌 보면 일리 있는 주장에도 홍콩 시민 100만명이 길거리에 나선 것은 바로 중국 때문이다. 이 법안이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반체제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의혹이 여전하다. 홍콩 정부는 법안 적용 대상을 기존 3년 이상 징역형에 해당하는 범죄에서 7년 이상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경우로 대폭 축소하는 수정안을 내놨다. 또 법안이 정치범이 아닌 형사범을 겨냥한 것이며 홍콩 시민들의 안전 보호와 사회 안정을 위한 것이라고 여론전에 나섰지만 민심은 냉소적이다.
홍콩 시민들의 불신에는 중국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 2015년 중국이 금지하는 금서(禁書)를 판매하던 홍콩 서점 주인들이 중국에 돌연 납치돼 본토 수사기관에서 조사받는 사건이 발생했고 2017년에는 중국 금융재벌 샤오젠화(肖建華) 회장이 홍콩 호텔에서 실종됐다 본토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지 20년이 지나도록 본토와 범죄인 인도 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도 협정이 정치범 송환에 악용될 수 있다는 중국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현재도 본토 공안들이 마음먹으면 누구나 홍콩에서 연행해갈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범죄인 인도법안'마저 통과될 경우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는 공포감이 시민들을 시위로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美연구기관 "홍콩 '범죄인 인도법안' 美안보에 심각한 위협"
미국 백악관 앞에서 벌어진 홍콩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지지 시위(사진=SCMP 캡처)
'범죄인 인도법안' 논란은 홍콩과 중국 사이만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달 16일(현지시간) 홍콩의 민주화운동 지도자인 마틴 리 전 민주당 창당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홍콩 정부가 제안한 범죄인 인도 관련 법률 개정안은 홍콩의 법치를 위협한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고 모건 오테이거스 미 국무부 대변인이 성명을 통해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의회 자문기구인 '미·중 경제안보위원회(USCC)'가 7일 낸 보고서를 통해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법안 통과를 관철하려는 홍콩 정부의 움직임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고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고서는 "홍콩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은 미국의 국가안보와 경제적 이익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이는 미국-홍콩 정책법의 핵심 조항에도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또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홍콩이 미국과 맺은 조약을 계속 이행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미국-홍콩 정책법 조항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홍콩 미국상공회의소는 앞서 지난 3월 홍콩 공안당국에 보낸 공개서한을 통해 "관련법이 통과돼 홍콩에 거주하거나 홍콩 공항에서 환승하는 외국 기업인들이 체포돼 중국으로 송환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커진다면 세계적 무역·금융 중심지라는 홍콩의 명성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홍콩의 마지막 총독을 지낸 영국의 원로 정치인 크리스 패튼도 "홍콩의 법치주의에 끔찍한 타격(terrible blow)을 줄 것"이라며 '범죄인 인도법안'을 공격했다. 패튼 전 총독은 SNS에 올린 동영상에서 홍콩의 행정 수반인 캐리 람(林鄭月娥) 행정장관이 법적인 구멍을 막기 위해 법안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데 대해 "완전한 난센스"라고 일축했다.
◆ 中관영매체 "반대파가 서방과 결탁해도 홍콩 정국 흔들 수 없어" 美 겨냥
9일 홍콩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다음날 중국의 국수주의적 성향 매체인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반대파가 서방과 결탁해도 홍콩 정국을 흔들 수 없다'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최근 일부 국제세력과 홍콩 반대세력은 결탁을 강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홍콩의 민주파 인사들이 지난 3월, 5월 미국을 방문한 점과 미국 정부가 홍콩 내정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며 "이는 중국과 갈등 중인 미국이 홍콩을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홍콩에서 민주화 관련 시위가 일어났을 경우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던 관례에 비춰 이례적인 반응이었다. 통상 주요 중국 매체들의 사설은 중국 선전 당국의 검열을 거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환구시보 사설이 제기한 의혹을 중국 정부가 간접적으로 수긍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최근 미국과의 소리 없는 전쟁이 무역분야를 넘어서 정치·사회 분야로 급속 확산되고 있어 신경이 곤두선 중국 정부로서는 홍콩 시민 100만 명이 참여한 시위가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높다.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중앙 정부는 홍콩 특별행정구 정부가 (범죄인 인도와 관련한) 2가지 조례를 개정하는 것을 확고히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떤 외부세력도 홍콩의 입법 활동에 간섭해 잘못된 언행을 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한다"며 미국을 겨냥했다.
일각에서는 12일 입법회에서 법률 개정안 통과여부가 가려질 때까지 시위가 이어질 경우 중국 정부가 강경책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캐리람 행정장관은 10일 언론과 기자회견에서 "이 법안은 홍콩의 정의를 지탱하고 홍콩이 다른 나라나 지역과 함께 범죄에 맞서 싸워야 하는 국제적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라며 법안 처리 강행 의지를 재확인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지난 9일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 학습 요강'을 통지하며 내부적인 사상 단속에 나섰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가 10일 소개한 학습 요강에는 당의 영도와 시진핑 사상이 포함된 헌법을 당과 국가의 지도 사상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몽(中國夢)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며 중국인들의 일치단결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