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학년도 수능' 을 이틀 앞둔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일성여고 3학년 교실 칠판에 '일성여고 화이팅' 글씨가 적혀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아까 선생님이 이게 정답이라고 말했어~"
"아니야, 답은 이거야!"
한자 문제를 두고 3학년 1반 학생들이 열띤 토론을 한다.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들. 최소 쉰이 넘은 이들은 모두 고3 수험생이다.
수능을 이틀 앞둔 12일 CBS 노컷뉴스 취재진이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일성여자고등학교를 찾았다. 이곳은 늦게나마 '배움'의 꿈을 이루기 위한 만학도들의 배움터다.
일성여고 3학년 1반 교실은 학생들이 조금 특별할 뿐 여느 교실과 다르지 않다. 40여 명의 눈이 선생님의 입과 칠판, 책을 바쁘게 따라간다. 학생들의 책에는 형형색색의 펜으로 필기한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다.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학생들이 눈에 띈다. 교실 한 쪽에 있는 게시판에는 이준 열사의 어록이 적혀 있다. "천하에 제일 위험한 것은 무식(無識)이요, 천하에 제일 위험한 것은 불학(不學)이다"
◇ "나에게 수능은 수십년 미뤘던 꿈이에요"3학년 1반 이만복(70)씨는 50여년 전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배움의 길이 끊겼다. 그런 이씨가 학교에 문을 두드린 건 67세가 되던 해. 이씨는 "나는 50년 동안 준비했던 사람"이라며 "20년 전에 학교 전화번호를 적어두고는 매년 올해는 될까, 또 안 되면 내년에 될까, 미루다가 67세까지 왔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가정 형편은 좋지 않았고, 2남 3녀 중 막내였던 이씨에게 공부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초졸 학력인 이씨는 음식 장사에 뛰어들었다. 취직하려 해도 대부분 최종 학력 요건이 중졸 이상이어서 기회조차 없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배우지 못한 아쉬움에 이씨는 가슴앓이를 했다. "배운 사람들을 보면 '나도 그랬으면…'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났다"고 이씨는 털어놨다. 운영하는 식당의 업종을 바꾸면서 오전에 여유 시간이 생겨 이씨에게도 배움이 허락됐다.
'만학도' 이만복(70) 씨가 '2020학년도 수능' 을 이틀 앞둔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일성여고에서 수능 문제집을 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71세가 되는 이듬해 이씨는 20학번 신입생이 된다. 이씨는 서울 4년제 대학 일어일문학과 수시 전형에 합격했다. 발표가 난 날, 이씨는 지난해 대학에 간 손주에게 전화를 걸어 합격 소식을 전했다. 꼬박 4년 동안 쪽잠을 자며 오전에는 학교 공부, 오후에는 장사에 매진하는 이씨를 보고 가족들은 "역시 우리 엄마, 할머니는 해내는구나"라며 응원을 보냈다. 대학 생활 걱정은 없냐는 질문에 이씨는 "험난한 4년도 버텼는데, 비단길 4년이야 못 가겠느냐는 생각"이라며 웃었다.
이씨에겐 꿈이 있다. 수십년 동안 장사를 하며 일본어를 독학한 이씨는 일본인 관광객을 안내하는 봉사를 하는 게 꿈이다. 이씨는 "일본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한국의 아픈 역사를 알려주고 싶다"며 "이제 돈 버는 것보다는 봉사하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 "나에게 수능은 '나아가는 것' 그 자체예요""웨얼 알 유 고잉?" 꼬박 1시간 넘게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일성여고 3학년 1반 이무선(72)씨가 외국인 남성에게 말을 걸었다. 50여년 전 초등학교를 나온 이후로 가방끈이 끊긴 이씨는 최근 서울 4년제 대학의 노인복지학과에 합격했다.
이씨가 30세 되던 해, 외국에서 일하는 남편이 사고를 당해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 이씨 홀로 두 남매를 키우게 됐다. 32년 동안 공장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한 이씨는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식들은 이루길 바랐다.
'만학도' 이무선(72) 씨가 '2020학년도 수능' 을 이틀 앞둔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일성여고에서 수능 기출집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마음으로만 늘 배우고 싶다 꿈꿨지, 공부하는 건 감히 상상도 못 했어요. 배울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이씨는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67세가 되던 해 정년퇴직을 한 뒤 한 달 동안 쉬면서 일자리도 구했지만, 헛헛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학교를 졸업한 지인의 추천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학창 시절 봤던 영어 교과서 내용이 아직도 기억난다는 이씨는 평생의 소원을 이뤘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씨는 "한글로만 알던 노래를 영어로 배울 때, 하늘을 날듯 감격했다"며 "길 가다가 영어나 한문을 스스럼없이 읽을 때, 지식이 쌓인 것을 느낄 때 제일 뿌듯하다"고 설명했다. 새벽까지 공부를 이어가기도 한 이씨는 이번에 대학 몇 곳에 합격했다.
노인복지과에 진학 예정인 그녀는 약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며 두 손을 모았다. 이씨는 "내가 지금까지 사회에 받은 만큼 봉사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다"며 "무엇이든 평생 후회하기보다는 용기를 내서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 "나에게 수능은 '감격'입니다"
'만학도' 이경랑(57) 씨가 '2020학년도 수능' 을 이틀 앞둔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일성여고에서 수능 문제집을 보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3학년 3반 이경랑(57)씨는 인터뷰 도중 여러 번 울먹였다. 지난해 일성여고에 입학한 이씨는 "처음 입학할 때는 영어나 컴퓨터나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왔는데, 대학 문까지 두드리게 됐고, 젊은 사람들과 함께 수능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난해 일성여고 학생들이 나온 한 TV 프로그램을 보고 곧장 학교에 전화를 걸었다. "방송을 보고 이때 아니면 정말 못 배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씨는 털어놨다. 6자매 중 둘째였던 이씨는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남편과 운영하는 가게를 잠깐 접으면서 학교에 올 수 있었다. 이씨는 "내가 한 일 중에서 제일 잘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닌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지만, 이씨는 많은 변화를 느끼고 있다. 혼자 해내는 것에 이전보다 두려움이 없어졌다. 이씨는 "처음 입학했을 땐 입학 소감문도 겨우 썼는데 지금은 백일장 장려상도 받고 파워포인트도 만들 수 있다"며 "여기 오지 않았다면 모두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만학도' 이만복(70), 이무선(72), 이경랑(57) 씨가 '2020학년도 수능' 을 이틀 앞둔 1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일성여고에서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학교에 함께 다니는 만학도들은 서로가 선생님이다. 늦게 시작한 만큼 열정이 남다르다. 일성여고의 등교 시간은 오전 8시 50분. 하지만 오전 7시면 학생들로 북적북적하다. 이씨는 "다들 굉장히 열정적"이라며 "오늘 아침 등교 시간에도 연세가 많은 학우 한 분이 오른손에 메모지를 쥐고 계속 단어를 외우는 모습을 봤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한때 교사를 꿈꿨던 이씨는 "예순이 넘어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대학 진학 후) 학과 공부를 깊이 있게 해서 강의를 하거나 봉사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수험생들에게는 "주어진 일을 가능한 즐기면서 최선을 다하자"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일성여고 학생 137명은 부푼 꿈을 안고 오는 14일 수능에 응시한다. 이들은 학생들과 함께 시험을 보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고 입을 모은다. "배움에는 세월이 없어요", "내 인생은 50부터가 시작이네요, 참말로" 만학도들이 모인 교실에서 수능은 성적을 겨뤄 대학에 진학하는 '시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