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가 지난해 말 결정한 키코(Knock-In·Knock-Out·통화옵션계약) 배상안 수용 여부를 놓고 해당 은행들이 5번째 결정 연기 신청을 했다.
10년 만에 사태 해결을 기대했던 피해기업들이 겪는 '희망고문'도 길어지고 있어 잊혀져가던 키코 사태를 재점화 시켰던 여당이 다시 한번 나서야 한다는게 피해기업들의 주장이다.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 우리은행만 배상…나머지 거부 혹은 연기금감원 분쟁조정위원회는 지난해 12월 12일 회의를 열고 키코 판매 은행들이 4개 피해기업에 대해 손실액의 15~41%를 배상하라는 내용의 조정결정을 내렸다.
은행별로는 신한은행이 150억원으로 배상액이 가장 많았고 이어 우리은행 42억원, 산업은행 28억원, 하나은행 18억원, 대구은행 11억원, 씨티은행 6억원 순이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우리은행만 조정결정을 받아들여 배상을 완료했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과 외국계인 씨티은행은 '배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조정결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그동안 조정결정 수용 여부 결정을 4차례나 미뤄왔던 신한.하나.대구은행 등 3개사는 지난 6일 5번째 결정 연기를 금감원에 요청했다.
"사외이사 교체와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배상결정 수용 여부에 대해 추가로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신한.하나은행 등 결정을 연기하고 있는 은행들이 공식 입장이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조정결정이 내려진 4개 피해기업 외에 나머지 145개 기업에 대한 자율배상까지 고려하면 은행별로 수백억원, 혹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배상액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윤석헌 금감원장은 최근 2주년 기자간담회를 통해 "10년 이상 끌어서 미완의 숙제로 남아있는 상황에서, 금액이 적은 건 아니지만 이걸 정리하고 가는 건 한국 금융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라며 은행의 적극적인 배상을 다시 한번 촉구했다.
다만, 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결정으로 윤 원장의 역할은 끝난 상황이다. 윤 원장도 "솔직히 저희들이 할 일은 얼추 했다"면서 "나머지는 은행의 판단"이라며 공을 은행 측에 넘겼다.
금감원 관계자는 "금융소비자보호 측면에서 키코 배상결정은 전례없는 성과"라고 평가하면서도 "은행들이 조정결정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하는 것은 감독당국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선을 그었다.
키코공대위, IDS홀딩스, 밸류인베스트코리아 피해자연합회 등 금융피해자연대 회원들과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민생경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금융범죄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며 해당 기업, 은행 등을 고발하기 앞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피해기업들 "참담하다…민주당이 나서라"이런 상황으로 인해 10년 만에 내려진 조정결정으로 그나마 숨통이 틔일 것으로 기대했던 피해기업들은 망연자실한 상황이다.
피해기업들로 이뤄진 키코공동대책위원회 조붕구 위원장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금융당국에서 권유한 결정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뭉개는 것을 보며 참담한 심정"이라며 "더이상 은행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했다"고 말했다.
이에 피해기업들과 대책위원회 측은 여당이 다시 한번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대책위원회는 총선 다음날인 지난달 16일 '국민의 절대적 지지로 선거혁명을 이루어 낸 민주당에 바란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냈다.
성명에서 이들은 "21대 국회의원들은 키코 사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여 기업들을 살려서 키코 사태로 사라진 32만명의 일자리를 재창출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당도 피해기업들의 이런 주장을 마냥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현 정부 출범 직후 꾸려진 민주당 적폐청산위원회은 지난 2017년 9월 키코 사태를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발생한 '금융권 3대 적폐' 가운데 하나로 지목했다.
그 결과 지난 2013년 9월 대법원이 키코에 대해 불공정성 및 사기성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사실상 종결됐던 키코 사태가 다시금 재점화되면서 조정결정까지 이끌어냈다.
특히, 3대 적폐 지목 이후 적폐청산을 목표로 금융위원회가 외부인사들을 영입해 꾸린 금융행정혁신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인물이 바로 현 금감원장이다.
결국 키코 사태 해결을 위해 현 여권이 윤 원장에게 총대를 맡겼지만 여러 제약사항 때문에 최종 해결이 요원해지자 피해기업들이 다시금 여당의 등판을 요구하고 나선 상황이다.
◇ '금융의 정치화' 우려도…"그런일 일어나지 않길"
대책위원회 측은 21대 국회 개원 이후 원구성이 마무리되는대로 더불어민주당 정무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접촉해 키코 사태의 최종 해결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조붕구 위원장은 "원 구성 이후 전방위적이고 적극적으로 의원들에게 호소할 계획"이라며 "특히 그동안 키코 사태에 관심을 보여왔던 민주당이 절대 다수당이 됐기 때문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민주당이 재등판해 은행들의 손실배상을 압박하는 것이 경영 독립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금융의 정치화를 초래할 수 있다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금융권 내에 적지 않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개별 은행 이사회에서 금융소비자보호와 배임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종 결정을 내리면 될 일"이라고 전제한 뒤 "정치권이 개입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